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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r 08. 2019

33. 아아, 드디어 손님께서 음료를 쏟았습니다.

<아아, 드디어 손님께서 음료를 쏟았습니다.>


아아, 드디어 손님께서 음료를 쏟았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손님이다. 작은 공간을 정성스레 꾸민다고 테이블마다 하얀 레이스 테이블보를 두었는데, 테이블보가 축축하게 갈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손님은 '아.' 하고 상황을 말해준다. 나는 한편에 차곡차곡 개어놓은 행주 더미를 들고 테이블로 갔다. 나는 손님의 상태부터 봤다. 손님의 위, 아래 옷은 모두 멀쩡했다. 손님의 소지품에도 튀지 않았다. 손님이 혹시 깨진 유리에 다치지 않았나 확인해본다. "저는 괜찮은데, 테이블보가.." 나는 테이블보를 바라본다. 테이블보 위에는 얼음이 나뒹굴어 다닌다. 커피를 머금고 있는 갈색 물은 기다란 테이블보를 타고 뚝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테이블 밑을 바라본다. 손님이 급하게 수습하려고 하셨는지 냅킨 뭉텅이가 축 늘어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아, 족히 냅킨 40장은 되는 것 같은데.' 당황해하는 손님께 다가가 말을 건넨다. "괜찮아요, 제가 다른 데로 테이블을 옮겨드릴게요!"


손님들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다. 나는 재빠르게 행주 두어 개를 바닥에 두고 테이블보를 걷었다. 얼음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테이블보를 보자기처럼 돌돌 말았다. 그리고 그 밑에 쟁반을 받쳐 싱크대로 가져갔다. 다시 사고 현장으로 돌아와 테이블에 묻어있는 음료들 닦아냈다. 가구들을 살펴보니 역시 음료가 튀어있다. 마른행주로 우선 닦고, 젖은 행주로 한 번 더 닦으니까 금방 깨끗해진다. 그래도 한 번 쏟아봤다고 이제 손이 제법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닦고 있는데 무언가 찜찜해서 벽을 봤다. 하얀 벽에 튄 음료 자국들. '아아, 신이시여. 제게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아무리 문질러봐도 커피 자국은 지워질 생각을 안 한다. 손님들이 여기를 힐끗힐끗 거리는 걸 보니 걱정되나 보다. 나는 괜히 걱정 끼쳐드리기 싫어서 대충 갈무리하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싱크대 안에 있는 테이블보는 흐르는 물에 대충 헹궈본다. 안된다. 안돼. 들고 가서 삶아야겠다. 


카페를 오픈한 지 반년도 안되었는데 벌써 여기저기 훼손된 자국들이 보인다. 포크로 긁힌 의자, 잦은 설거지로 인해 문양이 벗겨진 컵과 그릇들, 이빨 자국이 남은 식기 커트너리, 커피 자국이 남은 하얀 벽, 벌써 두 번째 바꾼 테이블보. 그래도 임대 계약한 2년 동안은 아무 문제없이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감가상각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문득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님한테 음료를 쏟아서 3일 치 매출액을 배상해드렸는데, 나는 훼손에 대해 아무런 배상을 못 받다니 부당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고 꾸욱 눌러 참았다. 아직도 옆 가게는 '상가 임대/문의 환영' 플랜카드가 붙어있다. 조금만 걸어 나가봐도 빈 상가가 허다하다. 도보로 1분만 걸어가면 또 다른 카페가 보인다. 여기는 '읍'에 위치해있지만 내 주변에만 해도 카페는 5개나 있다(더 있을 수도 있다). 친절한 사장, 맛있는 음료, 배려 넘치는 카페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구나. 카페의 소품, 가구들, 식기도구는 모두 소모품일 뿐이다. 소모품은 언젠가 교체해야 하고, 그게 지금일 뿐이다. 나는 장부에 깨진 컵 값 -1만 5천 원, 지워지지 않는 테이블보 -3만 원이라고 적었다.

싱크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테이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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