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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r 09. 2019

34. 어차피 있을 수밖에 없는 '적'이라면

여러분을 위한 '적'을 만드세요.

<어차피 있을 수밖에 없는 '적'이라면, 여러분을 위한 '적'을 만드세요.>


오늘도 카페 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은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다. 나는 '웬일이래!'하고 손님에게 문을 열어 드렸다. 손님은 카페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음료를 한 잔 주문한다. 음료를 테이블에 갖다 드리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노트북을 켰다. 집에 필요한 생필품들도 주문하고, 인터넷 뉴스도 조금 보고, 카페를 홍보하기 위해 블로그에도 글을 올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손님여유롭게 커피 한 잔, 나도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며 오전을 즐겼다. 잠시 뒤 손님이 "저기요.."라고 말을 건넨다.


손님에게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라고 물어본다. 손님은 주저주저한다. 말을 건넬까 말까 수어 번 고민한다. 차마 말을 못 하겠는지 입을 다문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보자 마음먹고, 떼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연다. 여기 카페의 보증금은 얼마냐, 월세는 얼마냐, 관리비나 전기세는 얼마나 나오고 있냐, 인테리어는 셀프로 한 거냐, 커피머신은 어디서 샀냐, 원두는 어디서 가져오냐, 한 번에 너무 많이 물어본 것 같다. 그래서 보증금은 얼마냐. 나는 순간 황당했다. 손님은 두 손을 꽉 잡고 있었는데,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손님은 절박한 거다. 절박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 나도 카페 오픈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었는데.. 마침 다른 손님도 없고 해서 솔직히 다 대답해줬다. 더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고 물어보시길래,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답변했다. 손님은 친절한 나에게 조금 미안한지 덧붙인다. "사실 내가 주변에서 카페를 하고 있는데.."


아,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손님은, 아니 사장님은 이 옆에 빈 상가에 관심이 있어서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카페가 있으니 다른 곳에 알아보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하신다. 월세가 요새 많이 올랐나 보다. 카페에 오시는 손님도 많이 줄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상황인데, 지금 있는 카페는 너무 노후화돼서 새로 알아보고 있다고 하신다. 나도 그 사장님의 상황에 한 몫한 것 같아서 괜히 민망했다. 우리 카페에 단골손님이 생긴 만큼, 다른 카페에서의 손님은 줄어들었을 테니까. 우리 카페에 손님들이 앉아있고, 저 카페에는 손님이 비어있는걸 나도 보았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사장님께서 미안해하신다. 다른 카페에 와서 이렇게 물어보는 게 폐가 되지 않나 주저주저하시면서 절박한 표정으로 물어보신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나는 사장님을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든 '적'일뿐일 텐데.. 많은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인생에 '적'이 없기는 어렵다. 살기 위한 생존권을 두고 '적'이 생길 수 있고, 사회생활을 하며 만든 '적'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인생에서 '적'을 쉽게 만드는 편이다. 나하고 친한 사람만 잘해주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쌀쌀맞았다. 설령 친하더라도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내 울타리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제법 싹싹한 모습을 보여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지만, 분명 '적'은 있었다. 대표적인 '적'은 팀장님이다. 나를 자기의 기준에 맞게 바꾸려고 하는데 진절머리가 났다. 회사동기들과 팀장님 욕을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만큼 쌓인 것도 많았고, 할 이야기도 많았다. 회사동기들이 팀장님을 '나쁜 사람'이라고 동조해주면 행복했다. 나는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팀장님을 증오했다. 그러나 퇴사 이후 모든 게 다 무의미해졌다.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해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은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고, 난 회사를 나갔다. 그 사람은 계속 그 사람이었고, 나는 애매한 인간으로 남아있다. 다만 그 사람을 미워했던 내 입, 내 행동, 내 마음만 거칠어졌을 뿐. 그것 외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카페로 찾아온 사장님은 특별했다. 나는 '적'에 대한 증오로 세월을 허비하느라 공허해졌지만, 그 사장님은 달랐다. 그 사장님에게 있어 나는 매출을 깎아먹는 '적'이었을 수 있다. 그 사장님에게 있어 나는 갑자기 카페를 오픈해서 본인의 입지를 불안케 하는 '적'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사장님은 내가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왔다. 나에 대한 증오로 본인의 마음을 갉아먹는 것보다, 본인을 위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그저 팀장님이라는 '적'을 정해서 비난하기 바빴다. 주변에서 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불러주길 바랬다. 그리고 누군가 팀장님을 '나쁜 놈'이라고 부르면, 나는 우월감을 느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저 팀장님이 이상한 거라니까.' 그런데 그렇게 그 사람을 비난해서 난 얻은 게 뭐 있나 도대체. 이런 모난 마음이 쌓이고 쌓여, 나는 이렇게 애매하게 남아버렸나.  


애초에 존경할 만한 적만을 상대해야 한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즉 내가 고귀해지기 위해서다. 존경할 만한 적과 정신의 전쟁을 치르며 고귀해지는 길이 있다면, 적에 대한 증오로 세월을 허비하느라  공허해지는 길도 있다. 니체는 말한다 "원한의 인간이 적을 상정하는 방식을 상상해보자. 바로 여기서 원한의 인간이 행위하고 창조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악한 적', 그러니까 '나쁜 놈'을 상정한다. 그런 인간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그로부터 어떤 잔상이자 상대인 다른 존재를 도출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놈'이다. 바로 자기 자신 말이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척해서는 안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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