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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Feb 22. 2019

20. 저 '나이' 트라우마 있어요.

나이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 연륜, 전문성

<저 '나이' 트라우마 있어요.>


카페 사장으로 일하면서 은근히 자주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몇 살 이세요?'라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 난감하다. '나이'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 연륜, 전문성 같은 게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몇 살'이 '연세'로 바뀌는 건 정말 싫지만, 이럴 때는 큰 숫자의 나이를 찾게 된다. 나는 질문을 받곤 우물쭈물하다가 큰 숫자를 불렀다.


"92년생이요."


손님은 계산을 살짝 해보더니 깜짝 놀란다. 그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위축됐다.

잠시 행복하고 소소한 일상에 젖어 잊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나이' 트라우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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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시절,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회의 시작 전 시간이 조금 남았다. 참석자들과 날씨, 오늘의 뉴스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분위기가 풀어져서인지 한 분이 나이를 물어본다. '나이'가 주는 힘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라 솔직히 대답했다.


"저 스물여섯 살입니다."


24살에 입사해서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니까 짬 좀 찼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고 있는 업무량도 많아져 다들 '과장급'업무를 한다고 치켜세워주니 괜한 용기가 생겼나 보다. 나름 당당하게 내 나이를 말했다. 하지만 눈 앞에서 변하는 참석자들의 표정과 말투를 보자 아찔했다. '아 실수했다.'  


나는 회의장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그저 회의 준비만 하러 온 신입 나부랭이인 것만 같았다. 전문가들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회의장에서 내 의견을 내면 무시하거나 혹은 어린 신입의 열정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무슨 말을 해도 없어 보였다. 나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여러 전문가들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 결과보고를 위한 속기를 시작했다.


이 사건 이후로 내 명함 뒤 타이틀을 하나 더 넣기 위해서 대학원을 등록했다. 코피 터져가며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괜한 고집이 많이 늘었다. 쓸데없이 자존심도 세졌다. 경력은 짧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허세를 부렸다. 그렇지만 그동안 내게 쌓인 경력은 고작 3년이었다. 고작 3년. 힘들게 딴 석사학위도 지방대라고 인정받지 못했다. 허망했다.


난 나 자신을 더 다그쳤다. '팀의 일이 곧 내 일'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미친 듯이 일했다. 팀원들이 내게 의지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파악하고 컨트롤하려고 했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했다. 주말에는 박사학위를 따러 대학원을 가고,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했다. 정말 미친 말처럼 달렸다. 그렇게 회사에서 3년 하고도 몇 개월을 더 보냈다.


그리고 2018년 10월, 나는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그만뒀다. 더 이상 빈껍데기 같은 나 자신이 필요 없어졌다. 평가도 진급도 필요 없는 지금 대학원에는 휴학계를 냈다. 지도교수님께 욕을 한 바가지 먹긴 했지만ㅡ 영어공부도 접었다. '기획', '트렌드', '언어 기술'과 관련된 책만 가득한 책장은 다 비워버렸다. 하지만 '나이'가 줬던 그 트라우마는 아직 떨쳐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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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트라우마 때문에 나도 모르게 표정을 조금 찌푸리며 서 있는데 손님이 환하게 웃으신다.

"젊은 사장님이네요. 저는 이 나이 먹고도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멋지셔요."

그저 지나가다 던지는 평범한 한 마디였다. 나도 그냥 그럭저럭 응대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지나서 다른 손님이 또 나이를 물어보신다. 이번에도 똑같이 응대했다. "92년생이요"

그 손님은 이어서 학번을 물어보더니 거꾸로 나이 계산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웃으신다.

"젊은 분이셔서 그런가 감각이 좋네요. 저도 카페 차리는 게 로망이었는데 부러워요."


시간이 흐르고 다른 손님이 또 나이를 물어보신다. 이번에는 계산하기 쉽도록 대답했다. "계란 한 판 채우기 2년 전이에요" 손님은 깔깔 웃으시더니 한 마디 하신다. "나는 곧 계란 두 판 채우거써. 젊은 사장도 계란 한 판 다 채울 때까지 카페 잘 버텨야지잉! 힘내 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깔깔 웃고 말았다.


그저 지나가다 던지는 평범한 한 마디인 줄 알았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손님들의 한 마디는 나의 '나이' 트라우마를 낫게 해 줄 알약이었다. '나이'를 감추고만 싶어서 영어점수, 학위, 업무량 같은 걸로 덮었던 암울한 시절을 잊게 해 줄 알약이었다. 오시는 손님들은 내가 어떤 회사에 다녔었는지, 어떤 전문기술이 있는지, 최종학교가 어디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단지 한 잔의 따뜻한 커피를 원할 뿐. 나는 어느새 '92년생'에서 '계란 한 판 되기 2년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 또 다른 손님이 나이를 물어보면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꽃다운 28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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