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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우 Nov 07. 2016

문혁이후의중국미술(1978-1984)

중국당대예술30년(CHINESE CONTEMPORARY ART)



문화대혁명이후 시기의 미술창작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인방(四人帮)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권력을 휘두르던 4명의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 정치국 위원, 왕훙원[王洪文] 부주석, 장춘차오[張春橋] 국무원 부총리를 가리킨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4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렸다.





가장 먼저 4인방 체제의 붕괴가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제재'면에 있어서는

문혁시기의 미술과 다를바가 없었다.

자본주의 계급을 비판하던 양식은 무산계급 혁명가를 찬양하는 양식으로,

등소평을 비판하던 그림들은 사인방을 비판하고,

혁명영웅을 칭송하던 작품들은, 새로운 정치에 부합하는 영웅들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술'이 정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명백히 느낄수있다.  



陈逸飞,魏景山<将家王朝的覆灭>1977年。

이 작품은 여전히 주제면에있어서는 문혁시기와

다를 바없이 혁명의 영웅들을 찬양하는

가송류의 작품으로 분류될지 모르지만, 표현면에 있어서는 많은 회화적 발전을 이루어낸 그림이다.

구도나 동작에있어서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살리기위해서 상해영화제작소의 배우들을 직접 모델로 고용해서 동작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연구했을 만큼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상화된 양식과 주관적인 상상으로그려진 문혁풍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있다.  





1979년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문혁미술로부터의 탈피가 시작된다.


"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실천은 진리를 경험할수 있는

유일한 기준"


 이라는 표어아래 대규모 토론이 벌어지고,

기존의 정치상관된 문혁예술에 변화가 찾아오게된다.


이와 더불어 80년대

《美术》 미술이라는 잡지 인터뷰중


磊磊는

"회화예술의 본질은 화가 내면의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생활중에 느끼는 기쁨과 슬픔 같은걸 표출해 내는것 말이죠."

라는 말을 함으로써 화가의 창작의 주요목적이

'자신의 표현'(自我表现)임을 다시 공고히 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상해와 북경에서 '민간예술'과

'자기표현' 을 강조하는 예술단체들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단체들로는 상해12인화전, 성성미전, 북경유화연구회 등을 들수있다.


詹建俊<高原之歌>1980年

이 작품은 작가가 서북지역의

어떤 고원에서 목격한 인상적인장면을

그려내었다. 서북고원의 호방함, 거침없는 자유로움, 몽환적인 느낌, 종교적인 느낌마저

드는 이작품속에는 기존의 문혁미술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작가의 개인적인 창작목적이 충분히

발휘된 것을 보여준다.






1979년 이후로 '문혁'을 겪은 청년예술가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실패에 대한 반성을 "문혁"에

조준하였다.


문혁,명령에따른창작,현실을왜곡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서양의 현실비판주의와 합쳐져

'상흔미술(伤痕美术)'라는 양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진실감과 비극감이 가득차있고, 형식면에서는 차가운 색채가 지배적이었으며 중립적인 회색의 정치적입장을 취하였다.


高小华<为什么>1979年

화가는 직접경험했던 장면을 역사적책임감을

가지고 화폭에 담으려했다. 이런 반정치적인 작품을 공공연히 그릴수가 없어서 부모님 집에 숨어서 창작에 매달렸다고한다. 작품의 제목 "왜?" 로 지은 이유를  화면의 주인공들의 표정을 통해 추측해 낼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기간중  모주석의 훌륭한 부하로서 활약한 홍위병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본래의 목적을 잃고, 자기들 내부에서 진정한 모주석의 추종자를 가리겠다며 '무투(武斗)'를 벌이는 사태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고 의미를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는 이런 비극속에서 답을 찾아보겠다고 고민하는 아이의 얼굴속에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있다.   


많은초기 상흔미술화가들이 이후에

"현실류"로 화풍이 변화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현실류, 생활류' 회화라 함은

향토사실주의 회화로도 대변된다.

'스토리(서사성)'과 '전형성(典型性)'

'사실성'을 중시하는 화풍을 가리킨다.


罗中立<父亲>1980年

이 작품은 중국의 대표 현대작가

나중립의 유화작품으로 생활류를 대표하는

그림이기도하다.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본

척 클로스(Chuck Close)의 포토리얼리즘 작품에

큰 영감을 받았다. 사진만큼 고 화질의 섬세함을 요하는 클로스의 초극현실주의 화풍을 사회적인 소재와 중국전통회화기술의 결합을 통해 완성한 명작이다.  




1978년 제 1호 《美术》잡지에서 모택동이

'시의 형식 사유'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미술계에는 '형식' 에대한

관심과 토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더불어

오관중이 《美术》잡지에서 회화의 형식미에대해

이야기를 한 이후로 수많은 잡지에서 이에대한 주제로 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형식미'

'유미화풍(有美画风)'과 동일시 되는 것으로

예술본체의 이해를 '형','색','선'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믿었고, 미술의 소재는 '비정치적','비문학적','비사회성','비현실성' 이어야한다고 주장했다.


王怀庆<伯乐>1980年

형식미를 강조하기위해 작가는 정치적인 주제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보다 인간중심적인 주제를 선택하기로했다. 백락(伯乐)이라는 중국의 전통 고사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하여, 좋은 말을 고를 수있는 재능을 가진 백락을 선택하여 '인재'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했다. 화풍은 문혁스타일을 탈피하였고, 후기인상화파의 그림에 더 가깝다고 할 수있겠다. 형식미에대해 더 논하자면, 검은색은 인재가 힘을 발휘할수없는 암울한 현실을 뜻하고, 백락 머리부분의 금색은 백락의 지혜를 가리키며, 말뒤에 반복되는 문양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인재에관한 문제를 상징한다.





개혁개방이후 다양한 나라의 예술, 서적, 화첩, 동영상을 접하게된 중국은 이소문(李少文)을

대표로 현대예술가들의 입장을 공표했다.


"오래된 중국의 방법을 쓸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이미 출현한 새로운

예술 방법을 이해해야한다."


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美术》 ,《美术研究》, 《新美术》등 잡지에서는

계속해서 서양현대예술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다룰것인지, 차용할 것인지에 대한 글들이 등장했다. 그 중 '전통예술','민간예술'과 서양현대예술간의 상호관계를 고려하는 생각도많이 등장했다. 몇몇 현대 예술가들은 서양 현대미술을 학습하는것과 차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증명하기도했다.


尚扬<爷爷的河>1984年

작가의 초기 화풍은 러시아현실주의 작가

레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후기에

섬북(陕北)지방에서의 생활과 보다 깊은 의식에대한 탐구를 하게되면서 스타일에 변화가 나타나게된다. 필법과 인물조형에있어서는 전통예술을 차용했고, 그림에 문학성요소를 최소화했다.  그림의 주제는 크게 '연결(connection)'이라고 할수있겠다.


할아버지와 손자로 이어지는 혈연의 승계, 문화상의 전통, 배경에 있는 황하강을 통해 천년동안 이어진 역사의 전통까지 모두

'지속','승계', '전통'이라는 키워드에서

연결의 의미를 끄집어낼수있다.  






1978년에서 1984년 까지

진행된 중국의 미술사조는

이러했다.  큰 틀에서 정리하자면,


첫째로 문혁미술에 대한반발,


둘째,문혁의 상처를 곱씹고 반성하는 상흔미술,


셋째,정치성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미술을 꿈꾼 형식미예술,


넷째, 개혁개방을 통해 이루어진 예술의 다양화를

들수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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