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오랜 날 만나도 마음을 꽁꽁 동여매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 만나도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
2년 전 어느 임원 수련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후, 따로 만나 차 한 잔 하자고 약속한 지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오늘에서야 나는 그녀에게로 간다.
“언니, 지금 버스 탔어요.”
“네, 정류장으로 마중 갈게요.”
이른 점심시간인데도 빼곡한 식당.
그래도 푸지게 먹어야 한다며 아귀찜을 시켰는데, 정작 메인 음식이 나왔을 땐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맛을 기억할 수 없다.
형제 중 유난히 똑똑해서 할머니가 아버지를 가르치려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
모 대학 총학생회장까지 역임한 아버지가 친척의 일로 연좌제에 걸려 모든 직업과 사업이 꺾여 이승과 결별해야 했다는 이야기.
학업을 중단하고 어렵게 상경하여 친척의 권유로 배운 미싱 자수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품에서 벗어나자 만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
엄마가 살아서 대학원을 꿈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신다면 많이 칭찬해 주실 것 같다는 한숨 섞인 이야기.
그래도 엄마가 두 남동생들을 끝까지 가르친 덕분에, 이제는 연좌제가 사라진 나라에서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
엄마가 시나브로 확장해 농사짓던 땅이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오른 바람에, 엄마 돌아가실 때 사 남매 모두 상속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유년 시절 아버지가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아 공부를 가르칠 때, 그 유세로 친구들에게 마당의 풀들을 다 뽑게 했다는 이야기.
정월 대보름이면 친구들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독대에 올려진 오곡밥을 서리해 먹다가, 메주인 줄 모르고 들고 와서 당황했던 이야기.
보름날 대문 밖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어른들에게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그 집 식구들 신발을 몽땅 통에 담아 물을 채워두었다는 이야기.
이 끝없는 이야기 속에 어느덧 우리의 점심시간은 끝나고, 그녀의 일터까지 가게 되었다.
미싱 자수가 궁금한 나에게 순식간에 기술을 선보인 그녀는, 태권도 도복이나 학생들 단체복을 주로 맡아 로고나 글자를 채워 넣는 일이라서 신학기가 시작되면 너무 바쁘다고 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만, 공허를 일깨우기 참 쉬운 것도 인연이다.
그녀와 오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온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 아랫목에 누운 듯 온 마음이 따습고 나른했다.
오늘 저녁엔 잡곡밥을 지어먹어야겠다고 말했더니,
“생전 요리를 못하게 생겨가지고 그런 것도 할 줄 아냐?”며,
맛있는 나물 반찬 집을 안다며 한사코 데리고 가 한아름 안겨주셨다.
나를 온전히 내보여도 아무 걱정이 없고, 내 서툰 속내를 들켜도 창피하지 않는 사람.
세상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겠지만, 서로가 그물망처럼 엮이지 않는 그 텅 빈 공간에는 더러 있다.
오늘에서야 나는 그녀의 나이를 알았다.
1960년생이란다.
오래오래 유지하고 싶은 인연의 목록에 기록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