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4.02.13. 치앙마이 올드타운
치앙마이 삼왕상
3024.02.13. 치앙마이 올드타운
빠이에서 이틀 쉬고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간다. 빠이 버스터미널에서 10시 차를 탔다. 이곳에 올 때 멀미가 걱정되어 멀미약을 먹었지만, 이번엔 먹지 않았다. 남편이 멀미약을 먹은 다음부터 속이 안 좋아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버스가 움직이며 스쿠터 타고 질주하던 익숙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안녕, 빠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마을인데 이상하게 아련하다. 빠이케년으로, 커피인 러브로, 메모리얼 브리지로, 윤라이로 다니던 때가 과거가 되어버렸다.
미니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치앙마이에 도착하여 숙소(루 벨리 누잇)로 갔다. 숙소는 남매가 운영하는데 매우 쾌활하며 잘 웃는다. 작디작은 고양이를 키우는데 벼룩처럼 톡톡 튀어 다닌다. 처음 본 우리에게도 다가와 안기며 목 뒤에 올라타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한다.
남편은 소수민족이 사는 곳을 가보고 싶어 했다. 인터넷 검색 결과 <쿤창키안>이라는 곳에 몽족이 산다고 하더라. 우리는 쿤창키안을 어떻게 갈 것인가? 여행사를 찾아가 정보를 알아보고 숙소 주인에게도 부탁하여 차량을 준비했다. 내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차량을 쓰기로 하고 1500바트에 예약을 했다.
숙소 주변 산책을 나갔다. 치앙마이 중심에는 해자로 둘러싸인 붉은 돌담의 성곽이 있다. 치앙마이의 모든 이야기는 이 사각형 성곽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성곽은 13세기 란나의 초대왕 망라이가 지은 것으로 당시에는 성곽 안쪽만이 치앙마이였다. 지금은 이곳을 올드시티라고 부르는데 재미있게도 치앙( city)마이(new)라는 명칭은 ‘새로운 도시’라는 의미이다.
가로 2km, 세로 1.8km의 규모로 지어졌던 란나 왕국의 수도 치앙마이는 확장을 거듭해 현재는 그 면적이 시작의 10배도 넘는 40km에 이른다. 성곽의 모양은 우리나라의 한양도성처럼 4개의 대문과 여러 쪽문을 갖고 있다.
당시 두 개의 타이족 국가가 북방을 양분하는데, 서북부에 (현재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 자리 잡은 란나 왕국과 북동부(현재 이싼, 라오스 지역)의 수코타이 왕국이 그 주인공이다.
망라이는 지금의 미얀마와 라오스의 접경지에 위치했던 응언양 왕국 라오 왕조의 25대 왕이다. 그런 그가 주변의 정세를 활용해 남쪽 소국들을 정복하며 새로운 나라를 만든 것이 <란나 왕국>이다.
같은 시기 동남아 대륙을 주름잡던 크메르 제국에는 <씨 인터라티>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크메르 서변방으로 도망 와 작은 왕국을 세웠는데, 그 집 막내아들이 역사에 길이 남는 수코타이 왕국의 <람캉행 대왕>이다.
그는 문무를 겸비함은 물론, 군사, 외교, 문화, 학문, 종교 등 전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 세종대왕처럼 지금의 ‘태국어’를 창제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크메르어의 변형)
특히 정복 활동은 란나의 망라이보다 더 대단했다. 그는 삼국동맹으로 원나라를 물리치고, 크메르까지 격파해 동남아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같은 해 란나와 수코타이 사이의 파야오라는 왕국에도 왕자가 태어나는데, 그가 파야오의 왕 응암무앙이다. 그는 꽤 나약하고 빨리 란나에 합병되는 바람에 딱히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태국 북부를 양분하는 망라이와 람캉행을 연결시켜 강력한 동갑내기 삼국동맹을 만든 일원이었기에 그 자체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치앙마이 올드타운 중심에는 이를 기념하는 삼왕상이 자리 잡고 있다. 혹자는 이 세 명의 왕이 치앙마이를 세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망라이가 주인공이고 두 왕은 도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