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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쁨은 네 삶이 아니다

에피소드_9894

by 인또삐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했을 때 어머니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그 웃음은 분명 나를 향했지만, 동시에 어머니 자신을 향한 위로 같았다. 내 성적표가 곧 어머니의 성적표였고, 내 성취가 곧 어머니의 늦은 성취였다. 그날 나는 알았다. 자식의 성취는 부모에게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자기 삶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부모의 기쁨은 당연하다. 자식은 부모의 살과 피로 태어나, 긴 세월 돌봄 속에 자란다. 그러니 자식이 빛날 때 부모는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또 부모는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자식에게서 본다. 그래서 자식의 성공은 부모에게 “인생 2회차 보너스”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곧 그림자가 된다. 기쁨이 지나쳐 대리만족으로 굳어질 때, 자식은 스스로의 삶을 살지 못하고 부모의 미완을 채우는 대리인이 된다. “내가 못한 걸 네가 대신 해라”라는 말은 격려가 아니라 압박이다. 성취는 자율이 아니라 굴레가 되고 만다.


더 큰 문제는 부모가 기쁨을 성취에만 묶을 때다. 그 순간 사랑은 조건부가 된다. 아이는 “잘해야 사랑받는다”는 공식 속에 갇힌다. 실패가 찾아오면 부모는 그것을 자기 실패로 여기고, 위로 대신 실망을 건넨다. 아이는 넘어지는 고통에 부모의 기대까지 짊어진다.


나는 경상도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어머니는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보였다. 그 눈물에는 "나는 가지 못한 길을 네가 대신 간다"는 속내가 섞여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부모의 기쁨은 사랑과 동시에 자신의 미완을 자식에게 건네는 슬픔을 품고 있음을.

그러나 사랑이 언제나 위험한 것은 아니다. 부모의 기쁨은 자식의 성취와 무관해야 한다. 빛나지 못할 때에도, 넘어져 있을 때에도, “너라서 좋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은 축복이 아니라 족쇄가 된다.

사랑은 경계를 허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울 줄도 알아야 한다.
“내 기쁨은 너의 기쁨에서 오지만, 너의 삶은 결코 나의 삶이 아니다.”
이 단순한 자각만으로도 대리만족의 그림자는 걷히고, 남는 것은 순수한 축복이다.


결국 부모의 진짜 기쁨은 자식의 성공이 아니다. 자식이 자기 속도로 자기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이 성공이든 실패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선 순간, 그것이야말로 부모에게 가장 큰 성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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