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류를 즐기다
11월 18일, 단풍 절정의 막바지에 아침부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우수수 떨어진 은행나무 잎들이 바닥을 온통 노랗게 물들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출근길이었는데 은행잎 덕분에 단풍 구경을 온 듯 특별하고 즐거웠다. 낙엽을 치워주시는 분들의 수고로움에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노란 꽃비를 맞으며 걸어가니 ‘꽃길만 걸어요’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걷다가 멈춰 서서 노란 꽃비를 찍어 보기도 하고,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끝이 말라 있는 잎 하나가 이마에 떨어졌는데, 따가워서 조금 놀랐다.
기분 좋게 출근해 오전 업무를 마치고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빈자리가 많지 않아서 인사만 몇 번 나눈 분이 내 앞에 앉으셨다. 인사만 몇 번 나누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던 분이었다. 천천히 밥을 먹으며 편안하게 대화가 오갔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조금 남아 회사 앞 산책로를 걸으러 나갔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에 매달린 단풍잎도 예뻤지만, 벤치 아래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들이 특히 예뻤다.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온통 가을이었다. 그때, 양손에 플라타너스 잎과 빨간 단풍잎을 들고 환하게 웃고 계신 그분이 보였다. 또 한 번의 우연이 거리를 좁혀 준 걸까. 우리는 같이 걸으며 한결 더 정다운 대화를 나눴다.
사무실에 돌아와 오후 업무를 하기 전, 함께한 시간이 오래 남아 업무 메신저로 처음 연락을 드렸다. 오후 업무 힘내시라는 말과 함께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를 보내드렸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감사와 응원의 인사와 함께, 나를 생각하며 써 주신 시를 보내주셨다.
오~매 단풍들것네
님 까만 머릿결에 노란 은행닢 날려오아
놀란듯이 치어다 보니
님 고운 얼굴에도 단풍들것네~~
오늘 출근길에 겪었던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시고, 김영랑 시인의 시를 고쳐 보내주신 거였다. 오후 업무가 바빠서 답시를 써드리지 못했다. 퇴근 후, 자기 전에 점심시간의 감동을 일기에 옮기며 짧게 답시를 써 봤다.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곱게 물든 빠알간 단풍닢 한 장
고운 님 마음처럼 넓은 플라타너스 나뭇닢 한 장
쥐어든 두 손엔 가을이 오래 머물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다음날, 조금 더 일찍 출근해서 앞면에는 김영랑 시인의 시를, 뒷면에는 주고받은 시를 적어 책갈피를 만들어 드렸다. 옛 선비들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기듯, 몇 번 인사만 나눈 사람과 이토록 고운 시간, 마음을 나누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봐도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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