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그해부터 임신 중까지 약 7년의 기간 동안 내게 하나의 숙제가 되어있었다.
벌어지지 않을 최악의 상황을 거듭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 안에 내가 만든 여러 대응으로 대비를 했다.
그 대응은 물질적, 심리적, 복합적인 것들로 참 다양했다. 친정엄마가 필요할 순간은 내 평생의 모든 순간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상견례, 결혼 준비, 결혼식, 명절, 임신, 출산, 육아. 벌어지지도 않은 순간을 상상하며 힘든 마음을 더 괴롭히는 날이 굉장히 많았다.
당장의 엄마의 부재에 힘들어하기에도 힘든데 살을 덧붙여 괴로워해야 했던 이유는 오롯이 내게 있었다.
나 스스로 엄마가 없는 내 모습을 못 견디게 불쌍히 여겼던 점이 그 이유였다.
누구에게라도 있을 수 있는 비극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엄마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기에 한없이 외로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감추려 해도 보일 내 약점을 굳이 스스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힘들면 병원을 찾아도 되겠지만 벌써 10여 년 전인 그 당시엔 병원은 비싼 곳, 기록이 남아 취업이 어려운 곳이라는 잘못된인상이 짙었다.
그저 '지금의 힘든 나'는 '지금의 내'가 감당해보자. 가족들을 위해 그렇게 하자.라고 다짐하며 '미래의 내가' 친정엄마가 필요할 상황에 너무 많이 울지 않길 바랐다.
난 굉장히 다혈질에 성격이 급하고 시끌벅적한 성격이지만 묵묵히 참아냈다.
물론 마냥 참는다는 게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과음과 방황으로 얼룩진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답이 없다는 걸 깨닫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막연히 죽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밤이 지나 아침이 밝으면 여전히 죽고 싶네 라며 힘든 주말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퇴근 후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 약속을 잡고어떤 날은 꼭 보고 싶던 영화 개봉 소식에 약속을 잡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가족이 출근을 하고 학교를 가며 그들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어느 날은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함이 되지 않으려고 이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대단한 사람이지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난 이토록 힘든 시간을 부지런하게 버텨가는 단단한 사람이니 나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말자고.
아빠의 재혼.
그때 아빠 나이 50대 초반
아빠도 남은 생이 많은데 평생 모시고 살 것 아니면 새사람 만나게 두시라는 조언들도 많았다
그때 나의 나이 20대 초반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여전히 부인과 사별 후 혼자 자녀를 키운다던지
혼자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을 보면 난 나를 더 힘들게 했던 아빠가 원망스럽다.
엄마가 중환자실로 옮겨졌을 때 아빠는 한 달 만에 집에 와 잠이 들었다.
늘 병동에서 엄마를 돌보던 아빠였지만 중환자실로 가버린 엄마 옆에 있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날밤 자고 있던 나를 깨운 건 수많은부재중 통화들.
전화를 받아보니 '아빠가 네 엄마 죽었다던데 사실이냐'라는 전화들이었다.
아빠는 한 달 만에 집에 와 방에서 깡소주를 들이켰고
숨만 붙어있던 엄마와 미리 이별한 채 전화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와이프가 죽었다며 문자를 돌렸던 것이다. 술이 떡이 된 아빠를 깨우느니 중환자실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저희 엄마 죽었나요?"라고 묻자 간단한 신원조회와 상황설명을 들은 간호사는 말했다.
"어머님 아직 살아 계세요."라고...
난 그 많은 부재중 전화들에 문자를 보냈다.
아빠가 취해서 실수하신 거라고.
스스로 씩씩하게 견뎌본다 한들 살면서 처음 보는 아빠의 눈물은 내게 두려움이었고 아빠의 무너짐은 내게 고통이었다. 우리 아빠는 못하는 게 없어 못할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기계도 뚝딱뚝딱, 어떠한 상황에도최고의 조치를 할 수 있는 센스 있는 사람이었는데 엄마와의 이별 이후 아빠는 내게 커다란 짐였다.
아빠의 말대로 난 늘 엄마만 생각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모자를 게 없이 살아온 우리
늘 아끼기만 했던 엄마가 안쓰럽고그리웠다.
평생 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줄 알았던 엄마와의 이별 후 아빠의 재혼을 겪었다.
아빠의 재혼은 엄마와의 이별을 함께 버텨왔던 가족의 와해로 느껴져 내겐 더 충격적인 사고였다.
난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아빠와 1년간 연락을 끊었다.
어떤 시간들은 아빠의 불행을 바랐지만
가족을 위해서 씩씩한 척을 하던 집을 벗어나 나를 위해 충분히 슬퍼할 수 있었다. 소리 내 울어도 가족들의 마음의 짐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속없이 즐거운 마음이 드는 날엔 슬퍼하기 바쁜 아빠의 눈치를 보지 않고 크게 웃기도 하는 날들을 보냈다.
나의 마음을 온전히 돌아볼 시간을 충분히 보내려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아빠가 이른 재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만들어'갔다.
엄마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더 외로웠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조금씩 편해갔다.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이런 사고를 겪진 않길 바란다. 하지만 나처럼 엄마와의 이별 후 파생되는 각양각색의 '사고'라 느껴지는 사연들이 있다면 이제는 정말 나를 위해 충분히 괴로워할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