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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라 Apr 22. 2022

생애 첫 커피의 맛

705호 활동 기록1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를 치르고 난 겨울,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해 보았다.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건너편에 그레이스 백화점이 새로 생겼고 새 백화점 9층에는 ‘Wave~’ 라는 상호의 아이스크림 카페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검정색 미니스커트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고, 발목을 높게 감싸는 검은 워커를 신은 채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인 것처럼 면접을 보았다. 나이를 세 살이나 올렸지만 키가 이미 성인만큼 자라서인지 아무도 진짜 나이를 개의치 않는듯했다. 열여섯 살에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펜싱부 실력이 좋아 전국체전에서 곧잘 상을 타오곤 했다. 그즈음 거의 매일 전화 통화를 하며 설렘을 주고받던 남자아이는 펜싱부에서 손꼽히는 선수 중 한 명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이혼으로 코치님 댁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코치님 댁에도 더 이상 지낼 수 없어 갈 곳이 없어지는 상황이라는데 연락이 끊길까 걱정이 되어 삐삐를 사주고 싶었다. 삐삐는 용돈으로 살 수 없는 고가의 물건이었기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 개의 발이 달린 호화로운 유리그릇에 딸기, 초코, 바닐라 색색의 아이스크림을 담아 옮기고, 작은 단지에 담긴 부드러운 크림과 흰 도자기 잔 세트에 갓 부어져 따듯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쉴 새 없이 날랐다. 나는 손이 느리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손이 빠른 내 친구는 카페 바깥에 놓인 기계에서 직접 뽑아주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판매 대금을 삥땅 쳤다. 손님이 커피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테이블에 놓인 잔을 걷어오라고 채근하던 검은 파마머리 사장님은 소공녀에 나오는 민틴 선생님 느낌이 났고, 주방에는 그의 언니인 갈색 파마머리의 할머니가 있었다.

알바생인 우리는 홀 서빙과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를 담당했다. 아이스크림을 뽑는데 금세 익숙해진 나는 콘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11층을 쌓는 위업을 달성했다. 열한 바퀴를 돌려 쌓은 아이스크림콘을 받는 아이들의 얼굴에 탄성이 피어올랐다. 아이스크림 맛은 초코와 혼합, 바닐라의 세 종류였는데 마감을 할 때면 한 개씩 뽑아먹는 자유가 허락되었다. 사장님은 맛을 아는 사람은 초코를 고르는 법이라고 말했다. 홀을 지배하는 사람은 스무 살짜리 남자였고, 사장님은 그를 김군이라고 불렀다. 무스를 발라넘긴 앞머리가 멀끔하고 창백한 얼굴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김군은 어딘가 남자다운 느낌이 조금 아쉬운,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근한 오빠도 아닌 어중간한 거리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한 달 가량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내 손엔 17만원이라는 큰 돈이 생겼다. 시급이 1,5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마지막 날 영업이 모두 끝나고 흰 봉투를 챙겨 받은 밤 아홉시, 김군은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우니 커피를 사준다고 했다. 그레이스 백화점 옆의 PaPa라는 이름의 통 창으로 지어진 복층 카페였다. 중학생에게 허락되지 않은 번화가의 한밤중 시간, 네온과 불빛이 가득한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2층 자리 창가에 앉은 돈 좀 가진 친구와 나. 그 날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비엔나 커피였다. 작고 하얀 커피잔에 뜨거운 커피를 담고 차가운 생크림을 동그랗게 띄운 자태는 백화점 9층에서 내가 매일 나르던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른들의 세상엔 그런 쓰고도 달콤한 것이 있었다. 황홀한 맛이 났다.

비엔나 커피 맛을 느끼며 나는 알게 되었다. 고된 노동의 대가에서 삐삐 값 11만원을 쓸 만큼이나 그 애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일을 하는 동안 설렘의 잔상도 날아가 버리고 그 애와 마음의 거리는 한 달만큼 멀어져 있었다. 다음날 나는 주방 할머니 심부름으로 매일 빙수에 넣을 떡을 사러 가던 지하 1층 에스컬레이터 옆에 진열되어 있던 코트를 입어보았다. 자꾸만 시선을 끌어 눈여겨봐 두었던 옷이었다. 어린 날의 사랑은 그랬다. 달고 매혹적이지만 어이없이 짧게 끝나 버려 쌉쌀한 맛이 났다. 내 관심은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방향을 옮기곤 했다. 1994년의 겨울,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식에 새로 장만한 예쁜 코트를 입고 간 1995년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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