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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Apr 22. 2024

치트키가 필요해.

못 보낸다고? 내가 돈 내고 산 건데?

다시 한번 되물을 새도 없이 Why(왜)? Why? Why? 를 한 세 번쯤 연이어 외친 것 같다.

고요한 새벽시간. 내 외침이 방안에 메아리쳐 울렸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우린 널 개인 소비자로 볼 수 없어. 같은 제품을 컬러만 다르게 이렇게 많이 샀잖아? 우리가 볼 땐 넌 도매상이야. 그러니 따로 도매계정으로 신청을 하든지 판매자로 신청하든지 해. 우리 이 주문 취소 할게. “ 라는 게 요지였다.


역시 남편이 준비한 몰래카메라 따위는 아니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차분한 말투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내가 내뱉은 말은



“노우.. 댓츠 호러블…(아니… 그거 너무 호러인데 나한테…)”


나는 어떻게든 이 주문 건을 살려내고 싶었다. 떠듬떠듬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인데 저는 절대 도매상이 아니에요. 그저 친구들과 한 단체 주문이고 제 아이디를 썼을 뿐입니다. 다시 이렇게 비슷한 주문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꼭 보내 주세요."


3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아마 더 짧았던 것 도 같은데 대답을 듣기까지 피가 머리에 다 쏠려서 귀까지 새빨개졌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GAP에서 해외 직구를 해볼 것을 추천한다. 꼭두새벽에 원어민과 실전 영어회화를 나눠볼 수 있다. )  


기다린 대답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규정상 어렵지만 우리끼리 논의해 보고 보내줄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고구마 같은 대답이었다.


절대 다시는 이 따위 구매대행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5만 원 벌자고 이렇게 피를 말려야 하다니 자책하며 전화가 끊겼다.


그날 밤은 정말 괴로웠다.


첫 손님이자 나의 첫 시도였다. 나를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맘카페에서 믿고 구매대행을 맡겼는데 불발이 된다는 건 나에게 꽤 큰 타격이었다.  


나는 성격상 여유롭고 느긋하지 못하다. 과제가 주어지면 다 놀고 마지막에 하는 성향이 아니라 거지같이 하더라도 다 해놓고 놀았다. 근데 이건 거지같이 처리해 놓을 수도 없는 희한한 모양새가 되었다. 단지 운에 맡겨야 했다.


다음날 저녁 늦게 다시 확인 한 메일 박스 상단에 갭에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클릭하기까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your order has been sent” (주문 건이 출발했습니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깨달은 바가 컸다.


1. 해외에 구매처가 있을 때 배송 문제가 생긴 경우 보내주는 사람을 직접 찾아갈 수도 없다. 물건을 물리적으로 들고 올 수 없다.

2. 고객 클레임이 들어와도 딱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3. 이 또한 좋은 시도였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무수한 첫 번째가 있다. 유명한 골프선수인 박세리 선수도 수많은 골프공을 쳤지만 첫 번째 공이 있었을 것이다. 김연아 선수도 수천번의 트리플 액셀을 연습했겠지만 처음 트리플 액셀이라는 걸 뛰어본 날이 있었을 것이다.


되든 안되든 일단 시작해 보는 첫 번째가 나는 참 중요하다고 본다.
조금 웅장한 표현으로는 알에서 한번 나와보겠다는 다짐이고 조금 거친 표현으로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보겠다는 용기이다.  


다행히 이 계기로 내 안에서 뭔가 트였다. 아 내가 온라인상에서 무엇인가를 팔 수 있구나.  무엇보다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직장에 나가지 않고 빠른 시간 동안 돈이라는 걸 벌 수 있구나.  


그래서 나는 이 실패도 아닌 성공도 아닌 묘한 첫 번째 시도에서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아, 참. 저 해외 직구한 옷들은 주문자들에게 잘 도착했냐고? 물론.


우린 홈플러스에서 정해진 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만났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캐리어안에 후드를 잔뜩 집어넣고 폭탄을 터트릴 것 같은 전사처럼 마트 1층에서 대기했다. 이름과 번호 뒷자리를 확인하고 정말 번개 같은 속도로 옷을 팔았다. 아니, 뿌렸다. 모쪼록 이건 뿌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종의 뒷거래라도 하듯. 엄마들은 쏜살같이 다가와 나에게 어떠한 추가 질문도 없이 겸연쩍은 표정만 짓고는 사라졌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혹시 주먹구구식으로 홈플러스서 해외 직구 구매대행으로 물건을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면 그렇다. 그게 바로 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참 용감했다.




이 시기 우리 가족은 살던 신림동 구축 빌라에서 신축 빌라로 이사를 감행했다. 내가 강남 출퇴근을 내가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사였다. 이 말은 정말로 복직을 하지 않겠다는 나의 처절한 몸무림의 표현이기도 했다. 넉넉치 못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아서 복지 사각지대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내던 신혼집은 신림동의 빌라로 필로티였다. 어떤 생명체든 그 방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우리 부부가 농담조로 이름 붙인 ‘죽음의 방’이 있었다. 곰팡이가 창궐했고 그 방에는 냉장고 말고는 그 식물조차도 놓을 수 없었다.


젠장. 나는 아끼며 사는 데 소질이 없다.  없으면 차라리 벌어서 쓰는 쪽에 가까웠고 내내 그런 삶을 살아왔었다. 근데 이렇게 부양자가 딸린 적은 없었다. 마치 아이는 새 둥지에서 아직 기능이 없는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 같았다.


사실, 친정이나 시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복귀를 결정했을 인간이었다.

친정엄마는 지방에 살며 아직 은퇴 전이었고, 같은 서울에 계시는 시어머니는 혹시나 내가 복귀를 할까 봐 염려하셨다.


가끔 전화를 나에게 걸어 대뜸 “나는 절대 애 못 본다!” 라며 엄포를 놓으셨다. 물어본 적 없는 대답이었다. 지금도 이때를 떠올리면 속이 쓰리다. 봐주고 안 봐주고를 떠나 나에겐 따뜻한 말 한마디와 지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나는 내 커리어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 같아 이 시기 엄청난 좌절을 경험했다. 아기를 안고 둥가둥가 창문 밖을 함께 보다가 그만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적도 있다.   


어쨌든 나는 직장 복귀를 포기하고 남편 직장과 가까운 쪽으로 우리는 터를 옮겼다. 15개월이 되었을 때, 아이는 낮 동안 잠시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본격 작당 모의를 한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아 물론 혼자만의 모의였지만. 딱 이때는 달에 100만 원만 벌고 싶다가 목표였다. 더 적어도 되니까 ‘저금’ 이란 걸 하고 싶다 생각했다.


나는 무작정 남대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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