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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가봄 Apr 29. 2024

5 만원으로 시작한 사업.

그런 말이 있다. 누군가 잘한다고 잘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아휴, 내가 하면 저거보다 잘하겠다.” 싶은 건 진짜 해야 한다고.


2017년부터는 인스타에서 아동복을 파는 판매자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쇼핑몰도 없이 블로그를 링크해 두고 판매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소비자들의 댓글도 붙고 옷에 대한 큰 설명도 필요 없었다. 감성과 느낌을 살려 찍어서 포스팅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그때 딱 드는 내 심정이 그랬다. 나도 패션 센스는 쟤보단 낫겠다. 그리고 고객 응대도 쟤보단 낫겠다.


솔직하게는 ‘어휴 어차피 시장 제품인데 드-릅게 비싸네.’ 쪽에 가까웠다.



비싸다는 생각은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나도 동대문에서 여성복을 떼다 소매로 팔아본 경험이 러브레터 때 있었기 때문에 대략의 도매가가 예측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명 ‘저거보단 낫겠다’ 병에 걸린 나는 아동복은 동대문이 아니라 남대문에서 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나름의 콘셉트를 잡았다.

첫째, 잘 볼 수 없는 나만의 옷을 가져올 것 (유명 메이저 도매 브랜드 말고)

둘째, 저렴하지만 품질이 시장 옷 같지 않을 것.

셋째, 내 아이도 꼭 입히고 싶은 것.


당시 아동복 시장은 트렌드가 확실했다. 총 천연색 아가방과 캐릭터 카툰이 그려진 아동복 시장은 성인복 축소판처럼 입히는 게 유행하기 시작했고, 해쉬태그로는 #북유럽아동복이나 #감성아동복이 꼬리표처럼 어느 피드에나 달려 있었다.



대부분 연한 무채색의 베이지 컬러가 주를 이루었다. 아동복 쇼핑몰은 너나 할 것 없이연한 베이지 아니면 크림색의 은은한 톤으로 옷을 선보였다.

당시 유행했던 아동복 색감과 콘셉트


그래서 일부러 반대로 갔다. 다 똑같은 걸 해선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레드오션인 거 나만의 블루오션을 찾아가 보자고 생각했다.


유행 타는 상품 말고, 바쁜 아이 등원 때 편하게 입힐 베이식한 것들로 골랐다.


진짜로 아이 옷 입혀본 엄마는 안다. 멋부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바쁜 아침 아이 옷을 코디해서 입히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마치 성난 황소의 발에 신발을 신겨 주는 것과 버금가는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휙휙 엄지손의 리듬으로 흘러가는 핸드폰 속 화면에서 잠시나마 시선을 붙잡아 두려면 무엇보다 채도가 밝고 색상이 눈에 띄는 것으로 고르자는 게 내 계획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 총알같이 남대문으로 날아가서 검은색 봉지에 봉지봉지 담아 왔다. 투자 금액은 5만 원 내 외. 그리고 그 옷들을 잘 다리고, 볕이 좋은 날을 골라 촬영에 돌입했다.


그때의 나를 옆에서 봤다면 말 그대로 생쇼를 다하는구나 싶을 것 같다. 작가라도 된 양 땀은 뻘뻘 흘리는데 촬영 도구는 핸드폰 카메라였다.


지금처럼 카메라 렌즈 눈알이 세 개나 달려있는 고급 사양의 핸드폰도 아니었다.  집에 있는 플라스틱 아동용 옷걸이에 내가 사 온 옷들을 코디해서 벽에 걸어 촬영했다.


당시 벽에 걸어 촬영했던 옷들 ㅎㅎ


생각해 보니 모델 컷도 필요했다. 모델로는 친 자식 찬스를 썼다.



만 1세에 쇼핑몰 모델로 데뷔시킨 것이다. 촬영하기엔 집이 너무 좁기도 하고 당시엔 대여 스튜디오(렌털 스튜디오)라는 개념도 잘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쇼핑센터로 나갔다.


이제 갓 돌 지난 아이는 천방지축이라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신장 개업한 매장 앞에 바람을 잔뜩 맞고 펄럭이는 풍선인형 처럼 나부대니 사진이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으면 눈알 뒤집어져 있거나 옷이 뒤틀려 있었다. 다음 옷으로 옷을 갈아입히려고 치면 자지러지며 울어 댔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500장을 찍어 겨우 5장을 건졌다. 그리고 쇼핑몰 이름을 정했다.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였다.


고된 촬영을 마치고 얼렁뚱땅 지은 이름이었지만 우리 둘은 이만한 이름이 없다며 대 만족했다. 그렇게 지은 이름으로 인스타그램을 개설하고 빛의 속도로 찍은 촬영물들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때의 나는 어처구니없지만 내 피드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다. 유행과 정 반대인 아동복 스타일이기도 하고 자신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뜨면 인플루언서가 되면 어쩌지 행복회로를 마구마구 돌려 댔다.  


나름 쇼핑몰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기업에서 신입을 선호하지 않고 경력자를 뽑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떠서 인스타그램을 켰을 때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좋아요 수는 18개. 십.. 팔…?


놀리기라도 하듯이 적게 눌러져 있는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서 다시 깨달았다. 아 일단 좋아요를 눌러줄 팔로워수가 0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해쉬태그를 통해 내 계정으로 들어오는지 그 알고리즘의 비밀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팔로워 수도 많이 불어 나, 다른 홍보수단 없이 오직 인스타그램으로만 1년에 딱 4번 봄, 여름, 가을, 겨울 장사를 해서 1년 기준 매출이 2억 이상 나는 찐 팔이피플* 이 될 수 있었다.

(* 인스타그램 판매상을 속칭)



이 글은 내가 경력단절 속에서 한 아이의 엄마로 성장한 기록이자, 2018년 기준 1조 2천억 원이나 하는 아동복 시장에 5만 원으로 도전장을 내민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흔하디 흔한 자기 계발서 속 이야기처럼 “야, 너도 할 수 있어.”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살다 보니 나처럼 고생스럽고 특이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 달았기 때문이다.  


아주 약간의 기세와 센스를 가진 내가 남들과 다른 특출 난 재능 없이, 8년 만에 서울에 신축 아파트를 <영끌해서 겨우> 살 수 있었던


나만의 버티기 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이제는 꺼내 놓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엄청난 극복 스토리도 아니고, 현재 굴지의 기업가가 된 건 더더욱 아니라, 아마 읽는 내내 황당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인생은 존버(존ㄴ 버티는) 아니겠는가. 8년간 나의 존버 스토리로 구독자와 함께 존버하고 싶다. 당장 지금 이 순간도.  




* 다음 화는 5/6일(월)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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