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우스갯소리로 ‘알고리즘의 간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운영하는 sns 계정의 떡상(완전 폭등)에 유리한 타이밍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 게시물이 AI가 선택한 알고리즘을 타고 대중에게 노출되는 시스템을 그렇게 부른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 설정해 놓은 알고리즘을 타고 갑자기 <인기게시물>에 오르면서 그게 자연적으로 게시물 광고처럼 메인화면에 장 시간 노출되어 팔로워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SNS를 하며 인플루언서를 노리는 사람들은 이 시스템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파워블로그 되는법’ 이라든가 ‘인스타그램에서 인기게시물에 오르는 방법’ 등의 강의도 있다. 심지어는 이 비밀을 우리 회사가 알고 있으니 우리가 너의 계정을 떡상시킬 수 있다고 대행을 맡기라는 광고도 정말 많다.
가끔 유명 일반인 인플루언서들을 인터뷰 한 영상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눈 떠보니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던가, 뭔가를 노리고 올린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과 장난치다 올린 게시물이었는데 그게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아 인플루언서가 되었습니다 등의 로또 당첨과 비슷한 후기를 보기도 한다.
그 당시 이렇게 계정을 띄우는 다양한 방법과 지름길이 필요한지 몰랐다. 당장은 해쉬태그도 잘 못 달고 남이 달아 놓은 해쉬태그를 복사 붙여 넣기 하곤 했다.
스스로 다른 이들과는 차별화를 두는 아동복이라고 해놓고 실제로 소비자가 검색해서 볼 수 있는 키워드인 해쉬태그는 차별화가 하나도 안되어 있었다.
다른 인스타 유명 인플루언서가 #북유럽아동복 #감성아동복 키워드를 썼으면 나도 따라 썼다.
#등원룩 #등원복 같은 키워드도 빼놓지 않았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해쉬태그를 나의 계정 콘셉트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맞춰 '어떻게' 달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사진만 주야장천 올려댔으니 내 계정은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며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돛단배 같았다.
팔로우를 해달라고 매번 내 아이 또래 엄마의 계정을 찾아다녔다. 예비 소비자라고 생각하는 계정을 발견하면 댓글로 <아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라고 댓글을 남기고 내 계정에도 찾아와 주기를 조신히 기다렸다.
기계적으로 다른 사람 계정에 무작정 찾아가서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좋아요' 를 누르고 댓글을 남겼다. 오로지 내 계정의 부흥을 위한 행동이었다. 정말로 주먹구구식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름 정공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뒤 돌아보니 진짜 노력파였다 싶다. 이 노력이 개인주의가 심한 해외였다면 먹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정이 많고 상부상조의 문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동 응답기처럼 열심히 댓글을 돌린 대가로 한국사람들의 상부상조 ‘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옛다! 관심! 의 의미로 팔로워수가 조금씩 쌓여갔던 것이다.
예전에 홍보하다가 빛의 속도로 정지를 당했던 맘 카페도 여전히 기웃거렸다. 나는 30-40대 여성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마치 처음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처럼 온라인 유세를 이어나갔다. 세력을 모으기 위해 매일 아이를 재우고 새벽 시간에 인터넷 바다를 유랑했다.
나름의 주관과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다. 친구랑 가족들부터 꼬셔서 동정과 애정이 묘하게 섞인 개업 신고 찬스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못내 몰라주길 바라기도 했다. 너무 형편없는 시작이었다는 걸 내가 스스로 인지하고 있어서였다. 나의 막노동(?)이 빛을 발해서 50명이 100명이 되었을 때 나는 첫 소규모 온라인 마켓을 열었다.
다 합쳐 8종류 정도 되는 상 하의를 가지고 말이다. 정말 지금 생각해 보면 이불킥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명의 모집단 중 10명이 내가 파는 제품에 관심을 보였고, 실제 구매로 이어지기도 했다. CS 창구랄 게 없어서 그냥 쿨하게 내 개인 핸드폰 번호도 오픈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을 때 "거기.. 땡땡 쇼핑몰이죠?" 하는 전화에 나도 모르게 너무 당황스러워 전화를 대뜸 끊어 버렸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예쁘거나, 특별한 것도 아니어서 도대체 고객의 관심을 어떻게 끈 것 이었나 생각해보면 글을 참 친절하게 썼다는 점 같다. 상품 설명 하나에 마치 옷을 디자인한 사람 같이 열과 성을 다해 적었다.
게다가 '도대체 이 사람 장사를 해서 남기는게 있나.' 라는 의심을 살 정도로 가격마저 친절했다.
내 SNS는 피드를 보기만해도 우월한 패션감각에 압도되어 막 아이에게 입히고 싶은 그런 피드가 아니었다.
팔로워수도 뭣도 없는 돗단배 상태에서 '친절함'과 '고객이왕'이라는 고전적인 수법이나에겐 무기이자 전부였다.
이에 더해서 나는 쾌속 고객 서비스를 첨가했다. 가능한 한 쿠팡배송급으로 빠르게 해주고 싶었다. 그냥 스쳐가는 쇼핑몰이 아니고 싶었다. 뇌리에 박히려면 갖을 수를 다 써야했다.
사실, 주문이 들어와도 소매상들은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재고가 없단 이야기다.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모르는 주문 건에 용감하게 사이즈별로 모든 재고를 안고 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동복 시장은 그게 심했다.
도매상에서도 소비자가 주문한 상품의 사이즈와 컬러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을 때가 태반이었다.
왜냐하면 아동복은 사이즈 범위가 정말 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성복 기준 여성 성인복의 경우 55,66,77 사이즈로 3단계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요즘엔 이름하야 '루즈핏‘ 이라는 이름아래 FREE 사이즈로 사이즈를 통일해 버려서 구매자도 판매자도 사이즈 선택에서 단순해진다.
그러나 아동복은 다르다. 똑같은 디자인의 티셔츠 한 장이 이제 막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영유아 사이즈부터 주니어 사이즈라고 부르는 제법 어른키와 몸무게랑 비슷한 초등학생 수준까지 1단계부터 7단계가 판매되기 때문에 사이즈 선택도, 판매도 어렵다.
게다가 도매상 또한 마찬가지로 소매상이 언제 주문을 넣을지 모르는 상태라 모든 사이즈를 다 가지고 있지 않다. 소위 잘 나가는 사이즈 몇 장만 매장에 두고 그 외 사이즈들은 전부 그때마다 공장에서 새로 발주를 넣어 미송을 잡는다. (*미송: 실제 결제는 이루어져도 물건이 안 나간 상태)
그래서 대부분 당시에 아동복 판매자들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제야 도매상에 연락해서 재고 여부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였다.
만약 도매상도 그 제품이 없는 상태라면 공장에서 만들어 와야 한다. 때문에 소매상들은 기약 없이 소비자에게 기다리라고 답변을 취한다. 주문한 사람이 갑이 아니라 을이 되는 모양새였다.
그 즉시 밤 시장(도매시장)에 연락을 해서 물건이 없다는 통보를 들은 지 3번째. 나는 마음을 바꿨다.
그날부터 잘 나가는 상품은 재고를 보유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남편은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하기도 했지만 재고가 안 팔리지 않게 그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게 내 무기였기 때문이다. 맨몸으로 일을 시작한 상태라 큰 손해도 없었다. 남들과 다 똑같이 하려고 하다 보면 승산이 없었다. 아동복 시장에서의 <빠른 배송> 그리고 <친절함>이 두 가지는 내가 가진 전부였다. 나는 고객에게 이 브랜드를 특별하게 각인시키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단 한벌을 시켜도 고객마다 편지도 썼던 것 같다. 그 쪽지에는 이 옷이 엄마가 아이에게 주는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지 않냐고. 아이가 이 옷을 입고 날개 달린 천사 같이 웃는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썼다. 이 말은 순도 100 퍼센트 진심이었고 고된 육아로 지친 엄마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닿길 바랐다.
가내수공업 같은 단어가 딱 어울리는 시기였다.
나는 사무실이 없어서 집안에서 일했다. 15평 빌라. 왠만한 집 거실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에 부엌과 화장실과 방 두 개가 다 있던 작디 작은 집에서 매일 육아와 사업이라는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너무 어렸고 남편은 늦게 퇴근했고 나는 정신이 없이 너무 바빴다. 우리 부부는이 시기에 당장 이혼할 것 처럼 싸워댔다.
그야말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