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의 첫 페이지
지켜오던 습관이 무너질 때가 있다.
주로 3일을 기점으로 유혹이 찾아올 때가 그렇다.
그 시점을 넘기면 주춤은 하더라도 길을 잃지는 않는다.
그 느낌은 얇지만 튼튼한 막을 뚫고 가는 느낌이다.
관성의 벽이라고 해야 할까, 두텁다.
나를 위한 판단과 나를 위한 판단 사이에 서있다.
수 천년 전 수렵 채집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는 본능이 중요했다.
지금은 그 본능이라는 부분을 죽여야만 성취할 수 있다.
조화를 이뤄보려 안달하지만, 나약함을 깨닫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원래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어렸을 때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았겠지,
라는 허울 좋은 변명과 핑계 속에서, 나약함을 깨닫곤 한다.
최근에는 힘들면 쉬고 졸리면 잔다.
배고프면 밥 먹고 되도록 기분 좋은 것들을 한다.
다만, 자기 전 그 상황을 이겨내는 방향 쪽으로 돌려 눕는다.
과식 후 잠드는 밤에는 내일이 있음에 안도한다.
내일의 나는 대체 어떤 죄를 지은 것일까,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힘들게 사는 사람은 죄를 지은 것일까,
수많은 실패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왕도는 있되, 정도는 내가 찾아야 한다.
돌아가더라도 나에게 맞는 길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을 도와줄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음이 개탄스러웠다.
왜, 나는 좋은 집안과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힘든 일들 다 겪어야 하는 것일까, 나약함을 깨닫곤 한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벼랑 끝에 설 때마다, 죽기보다 살기를 선택했다.
적들을 베어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그러다 떨어져도 괜찮다.
다시 올라가면 된다.
열심히 한 나에게는 벼랑 밑도 괜찮다.
다만, 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배필을 만나고 싶더라도, 인연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는 포기와는 다르다.
노력의 끝이 벼랑 밑이 될 수도 있다.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는 선택, 그런 나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못하면 안 해도 된다.
구태여, 매달리고 맹신하기 시작하는 것들은 나를 해친다.
나의 스승도 내가 그림자보다 새로운 스승이 되기를 원하듯
못하는 것은 안 해도 된다.
그전에,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오늘도 못한 나일지라도, 나를 끌어안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