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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 사용법

첫 진료, 그리고 다시

by 아론

2016년의 여름날이었다. 먼지 가득 쌓인 서랍장 속 파일철을 꺼낸 듯한 기억.




당시 나의 부서는 선후배 관계가 명확했고 '군대 문화'라고 불리는 악폐습이 가득했다.


부서의 중간관리자들은 욕설을 달고 살았고 꽃게를 가득 담은 세숫대야처럼 서로 잡아당기고 헐뜯었다.


특히 매사에 짜증과 화로 가득 찬 채 노하우와 기술들을 알려주지 않는 선배들. 더 큰 문제는 일을 잘하게끔 보이도록 교묘하게 상황을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신입들을 내쫓아 인건비 절감에 기여하고 있다는 헛소리가 우스갯소리가 통용될 정도로.


모두가 힘들어했지만, 사회 경험이라곤 어머니 부업을 도왔던 게 전부였던 나는 더 크게 흔들렸다.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에, 내가 잘못이라고 느꼈다.


나는 다른 부서사람들은 그때의 나를 회상하며 '항상 뛰고 있다'라고 했다. 그들의 질문에 '뛰어야 그나마 덜 혼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바보같이 당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즈음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향했다. 잠시 마음이 후련했다. 그리고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약의 효과는 엄청났다. 그들의 어떤 폭언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마음에 마취제를 투여한 느낌이랄까. 코로나 후유증처럼 삶의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했다.


이후 관리자와 면담을 통해 근무조 재편성을 통해 그 선배와는 멀어졌다. 진저리 치게 싫은 인간들.


그들을 지우기 위해 복용했던 신경안정제는 그때의 기억을 강렬하게 감싼 채 멀어져 갔다.




기억이 결심까지 더 멀어지게 하기 전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진료 예약도 쉽지 않았다. 2주 뒤에나 예약이 가능했다.


선생님은 친절할까, 나 같은 사람이 한 무더기 다녀갔을 텐데, 냉담하게 받아지면 어떡하지.


생각보다 빠르게 2주가 지났다. 마스크를 쓴 선생님은 무뚝뚝하게 보였고 상투적인 제스처와 끄덕임, 그리고 가정사와 겪어온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뿌옇게 쌓인 먼지들을 툭툭 털어낸 액자 속 나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글을 적고 책도 읽으며 음악을 하고 작지만 유튜브채널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안함이 가시지 않아요. 계속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하던 것들도 잘 해내지 못하곤 하네요.'


'xx님은 참 열심히 사셨군요, 지금까지 잘 견뎌오셨네요.' 나의 말이 멈춘 곳에 마음의 강을 노를 저어 오는 듯한 말씀이 건너왔다.




선생님은 진료를 위해 경청하고 있었고 그의 최선의 공감을 했던 것이다. 빼곡히 적힌 차트를 읽으며 닫힌 문을 여는 노크 같은 말들이 오갔다.


속을 터놓고 말한다는 건 말을 꺼내는 용기와 들어주는 인내가 어우러지는 것. 아주 친한 친구를 새로이 사귄듯한 따스함이 감돌았다.


약을 꼭 먹을 필요는 없지만, 증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조심스레 권하셨다. '약을 먹어서 더 빨리 좋아지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다른 것도 빨리 하시려다 불안하셨는데, 이것도 빨리 하시려고요?' 얻어맞은 듯한 말씀에 머쓱하게 웃었다. 약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으니 아주 적은 양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의 불안함을 독학으로 이겨내고자 읽던 심리학 책들, 상담 관련 서적들에서는 결국 직면에 다가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


이후, 무엇이든 직면하며 지냈다. 결국 해야 한다면 가장 빠르게 하는 게 좋다. 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은 고백은 상처만을 남기듯, 조금 더 빨리 나아간 대가는 흉터 가득한 마음이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며 삶을 다시 되돌아보려고 한다. 나를 아끼는 행동이라 생각한 것들이 나를 해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내가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놀라움, 그리고 기쁨. 9년 만에 찾아간 병원. 알 수 없는 우울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조금은 실마리를 얻어낸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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