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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옛사랑, 영화 호우시절

그와 그녀의 새로운 선택은...

by 늘 담담하게




낯선 곳에서 옛사랑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좀 다르게 질문해 볼까요?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던 그 사랑이 기적처럼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면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요? 예전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그것도 여전히 혼자인 채로 말이에요. 이런 물음에 우리는 과연 쉽게 답할 수 있을까요? 한번 지나간 인연은 다시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다시 보내야 하는 걸까요? 지금의 현실들이 여전히 녹록지 않기 때문에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만났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잊어야 하는 걸까요?



영화 호우시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어디에서였던가, 아쉽게 놓쳐버린 사랑에 대해,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섬세한 감성으로 풀어놓습니다.


허진호의 영화들은, 사랑이 결코 달콤한 것만이 아니라, 삶의 길에서 수없이 마주치게 되는 현실의 갖가지 조건과 장애, 그리고 시간에 의해 어떻게 변색되고 스러져가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만의 방식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한 사진사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려냈던 8월의 크리스마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했던 대사가 귀에 남았던 봄날은 간다, 배우자의 교통사고를 통해 알게 된 고통스러운 비밀과 그 위에서 새로운 사랑을 나누었던 외출 등,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들과 함께, 그의 영화들은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그의 전작들은 관객들에게 뚜렷한 결말을 내어주지 않고 다소 모호한 결말이 많았습니다. 이미 사진사는 죽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두려워하는 여자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지만 결국에는 그 사랑이 결국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야 만 남자. 그가 말하고자 하고 보여준 것들은 빛나는 사랑의 결실이 아닌, 쓸쓸하고 애잔한 사랑뒤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 호우시절은, 전작들의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와 전작들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서


“전작들은 모르는 남녀가 처음 만나는 이야기였는데 호우시절에서는 과거에 좋아했지만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남녀가 만난다. 여기에는 ‘때’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열렬한 사랑이 아닌 바에야 연애에서는 인생에서 언제 만나느냐라는 시기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 호우시절은 전보다 가볍긴 하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고민보다 설정이 먼저 있었고 정해진 상황과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앞으로도 더 가벼워지면 좋겠다”라고 해서 향후 허진호표 멜로 영화들의 변화를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을 함께 했던 동하와 메이.


문학을 전공했고 시인을 꿈꾸었던 동하는 이제 건설기계회사의 팀장으로 그의 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꿈과 현실의 간격, 그 아쉬움을 잠시나마 위로받게 되는 두보초당에서, 그는 유학시절 사랑했던 메이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가며 예전의 유학시절의 기억들을 퍼즐 맞추듯이 떠올립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들을 부인하고, 서로의 기억들을 불신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애써 감춰두었던 것들을 솔직하게 꺼내놓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숨어있던 애틋한 감정들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사랑이 결코 조작된 기억이 아닌 과거의 시간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잊은 줄만 알았던 옛사랑, 추억으로 남은 줄만 알았던 그 사랑이 이제 눈앞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동하와 메이는 서로에게 묻습니다. 과거 그들이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다가갔더라면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서로를 놓쳐버렸는지, 무엇이 그들을 엇갈리게 했고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만나게 했는지에 대해서.



여기서 영화는 기억과 시간 그리고 사랑에서 존재하게 되는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갖게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나 온 우리의 삶에서, 애틋했던 감정 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것을 제때에 알아채지 못하거나, 용기가 부족하여 놓치고 말았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뒤늦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그 사랑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린 그런 안타까운 기억들을 동하와 메이의 만남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동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메이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한번 지나치는 것들은 쉽게 돌이킬 수 없고 다시는 그 순간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우리 삶의 슬픔을 알기 때문에 동하는 더 이상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것으로 메이를 또다시 놓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동하의 마음을 메이도 알게 되었고, 그녀 또한 동하를 잡으려 하지만, 그녀가 처한 현실, 영화후반부에서야 드러나는 메이의 아픈 상처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매어 있지만, 과거의 기억 속에서 찾아온 옛사랑을 쉽사리 떨쳐 보내지 못하는 메이. 그 혼란과 안타까움에 메이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두보의 시처럼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지난 상처들을 지우고 새로운 사랑의 설렘과 시작을 알려주는 것일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이 영화에서 몇 가지 주제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을 끄집어내어 보면...



첫 번째 청두라는 도시.


이 영화에서 청두라는 도시가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하와 메이가 다시 만난 때가 대지진의 참사가 있은지 일 년 뒤의 청도라는 것은 동하와 메이가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영화에서 동하가 청두에 출장을 온 이유는 지진 피해의 복구를 위한 건설중장비의 판매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에 동하가 지진으로 파괴된 건물의 복구 현장을 둘러보는 장면은 지진으로 큰 상처를 안고 있는 메이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지만, 무너진 건물들을 다시 세우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처럼, 동하와 메이의 새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학시절 문학을 전공했던 두 사람이 우연하게 다시 만난 곳이 두보초당이라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때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동하가 뛰어난 시인이 머물렀던 곳에서 옛사랑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이미 잊히고 추억으로 남은 옛사랑을 만났다는 것 이외에 그가 한때 간직했던 젊은 날의 꿈과 소망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타협하며 하루하루 꿈을 잊은 채로 살아가던 동하는 메이와의 재회를 통해, 그가 잊고 있었던 꿈을, 예전보다 훨씬 성숙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메이와 함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외로움이라는 것.


영화에서 동하가 다니는 회사의 청두지사장을 연기했던 김상호는 이 영화에 대한 인터뷰에서 “시나리오의 이중적인 면이 좋았어요. 분명 외로운 사람들 이야기인데 자기 입으로 외롭지 않다고 말하잖아요. 그들이 더 외로워 보이거든요”


자신의 맡은 역할에 대해서도.


“가족과 떨어져 중국에 사는 지사장에게는 주인공들과는 또 다른 외로움이 있어요. 허진호 감독님은 주인공의 고독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인물들을 희화화 거나 억지스러운 반전을 넣지 않아요. 주인공과는 다른 외로움을 병치하고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부각하죠”



그의 말대로 영화 속의 동하와 메이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밝고 건강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표정과 말에서는 두 사람이 고단한 현실에서 외로워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메이가 집에서 텅 빈 방을 열어보는 것도, 호텔방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동하의 모습에서 두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서로를 만났을 때의 행복한 모습과 대비된 모습으로 비칠 때 두 사람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허진호감독이 말했던 때라고 하는 것..


인생에서 언제 만나느냐가 중요하다는 허진호 감독의 말처럼 동하와 메이가 처음 만났던 대학시절은 그들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은 갖고 있었으나, 미래가 불확실한 시점에서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그리고 그 감정을 고백하는 것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시절은 적절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메이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결국은 여자친구가 생겨 메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것도 엇갈리며 같이 하지 못하는 좋은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내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


이제 좀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났지만, 영화는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닌 그들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상처를 포용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하가 메이를 병원에 두고 귀국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메이의 상처는 동하가 옆에 있는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청두와 서울이라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감정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영화에서 메이가 나직하게 읊조리던 대사..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라는 대사도 결국 때에 대한 질문입니다.


네 번째 새로운 시작


동하가 보낸 편지, 그것은 오래전에 동하에게 보내졌던 메이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며 그때에 전해지지 못한 메이의 사랑에 대한 동하의 화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두 사람의 사랑의 증표였던 자전거를 편지와 함께 메이에게 다시 보낸 것은 두 번째로 시작되는 사랑의 새로운 증거였습니다. 메이는 동하가 보낸 자전거를 위태로운 모습으로 다시 타려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멋지게 자전거 타기를 성공합니다.


그것은 그 옛날, 대학시절 동하와 나누었던 사랑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다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메이가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우리들에게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의 설렘과 희망, 그리고 가슴 가득 따뜻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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