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사시의 5월은 에도에도 없다.
지금은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홋카이도 서남부 지역의 마츠마에, 에사시 지역을 여행하고 있지만 내가 처음 에사시를 갔을 때만 해도 한국인을 본 처음 본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지금도 짧은 일정으로 에사시를 다녀오기는 쉽지 않다.
이 철도 여행기를 통해 2014년에 폐선이 된 에사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에사시 여행도 다룰 예정이라고 했는데 드디어 때가 되었다.
자, 에사시정江差町이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보자.
에사시는 홋카이도 히야마 진흥국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인구는 2025년 10월 31일 기준, 6,431명이다. 홋카이도에는 에사시라는 지명이 2곳이 있다. 홋카이도 북부 소야 종합진흥국에 있는 에사시초(枝幸町)와 구별하기 위해 히야마에사시(檜山江差) 혹은 도난의 에사시(道南の江差)로 부르기도 한다.
앗사부가와(厚沢部川)를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로 나뉜다. 남부 대부분은 텐구다케(天狗岳), 사사야마(笹山), 모토야마(元山)등으로 이루어진 산지이며 서쪽 해안에 중심지가 있다. 앗사부가와 입구 쪽에도 중소규모 마을이 있다. 북부는 농경지 절반, 산지 절반이다. 지명인 에사시는 아이누어로 곶을 뜻하는 '에사우시(e-sa-us-i)'에서 따온 것이다.
에사시에는 조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처음 역사 기록에 나오는 것은 658년(아스카 시대)에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에사시에서 아이누에게 향응(饗応)했다'는 것이다. 710년에는 여기서 중국대륙으로의 항로를 모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인이 정착한 것은 헤이안 시대로 홋카이도에서 가장 먼저 일본인들이 정착한 곳이다. 1216년에 우바가미 대신궁(姥神大神宮)이 창건되었으며 1593년에는 카키자키 요시히로(蠣崎慶広)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홋카이도의 통치를 인정받아 마츠마에 번 소속이 된다. 1669년에는 마츠마에 번의 분리정책과 무역불균형으로 발생한 샤쿠샤인의 봉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1741년에는 마츠마에오시마(松前大島)의 화산이 폭발하여 쓰나미가 해안을 덮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코다테 전쟁 와중인 1868년에는 구막부군에게 점령되어 에조 공화국 치하에 들어갔으나 막부 측의 주력 프리깃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가 에사시 앞바다에서 풍랑에 좌초되어 침몰하면서 전황이 급변하여 다시 수복된다. 1900년에는 주변에 있던 27개 마을을 흡수하여 에사시초(江差町)가 되었으며 1955년에는 토마리무라(泊村)를 합병한다.
진흥국 청사 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어획량이 줄고 청년층 인구유출이 심화되면서 인구감소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1997년에 과소지역으로 지정되고 2006년에는 삿포로로 가는 버스 노선이, 2014년에는 에사시선마저 폐선되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에사시는 하코다테시, 마쓰마에정과 함께 홋카이도에서 가장 빨리 일본인들이 이주했던 지역 중 하나였고 에도시대에는 청어의 어장 및 기타마에선北前船 에 의한 히노키 아스나로 ヒノキアスナロ 등의 교역항에서, 「에사시의 5월은 에도에도 없다」라고 할 정도로 번창했다.
*히노키 아스나로 ヒノキアスナロ
편백나무, 편백과에 속하는 일본 특산의 상록 교목, 나한백(羅漢柏)
*기타마에선
기타마에선(北前船)은 일본 에도 시대(17세기 후반~19세기 중반)에 활약한 상업용 해상 무역선이자 해상 교역 네트워크를 가리키는 말로써 단순한 배 이름이 아니라, 특정 항로와 상업 시스템 전체를 의미한다.
단어 그 자체의 의미는 “북쪽으로 가는 배”라는 뜻으로 일본 전국을 오가며 직접 매매를 하는 이동 상인선이었다. 정해진 화물만 운송하는 것이 아니라 항구마다 물품을 사고팔았다. 주요 항로는 오사카 → 동해 연안 → 홋카이도(에조치)로 이어졌다.
주요 교역 물품 내역을 보면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쪽으로는 쌀, 청어, 다시마, 연어, 해산물이 운송되었고 남쪽에서 북쪽 지방으로는 면직물, 술, 간장, 종이, 철기류, 생활용품 등이 운송되었다.
이 기타마에선이 가지는 역사 경제적 위치는 어떤 것이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① 일본 최초의 전국적 해상 유통망
육로보다 빠르고 대량 수송 가능했고, 각 지역 경제를 전국 시장과 연결했다.
② 상인 자본의 성장
기타마에선 상인들은 큰 부를 축적하여 호쿠리쿠·니가타·야마가타 등에 호상(豪商)이 등장했다.
③ 지역 문화 확산
음식, 공예, 가요, 생활양식이 항구 도시를 통해 전파되었고 항구 도시가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기타마에선은 메이지 시대 이후 철도가 개통되고, 증기선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전통 범선인 주종이었던 탓에 점차 사라져 갔다.
인구 감소 지역인 에사시는 대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이었으며, 이따금 관광객이 보일 뿐이었다. 에사시의 바닷가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에사시여행에 나섰다.
제일 먼저 항구로 나가, 가이요마루 기념관開陽丸記念館을 찾았다.
가이요마루(開陽丸)는 일본 막부 말기(에도 막부 최후기)에 건조된 최신식 서양식 군함으로, 막부의 해군력과 근대화 시도를 상징하는 군함이었다. 1866년 네덜란드에서 건조되었고 증기식 군함으로 배수량은 약 2.500톤, 대포 26문이 설치된 당시로서는 일본 최대, 최신의 군함이었다. 이 군함이 네덜란드에서 건조된 것은 에도막부 시기 내내 쇄국 정책이 유지되면서도 네덜란드와만 제한적인 교류(난학)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건조된 가이요마루는 서양식 항해술, 포술, 증기기관 운영 등을 종합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일본 근대 해군의 교본 같은 배였다. 하코다테 전쟁이 발발한 이후 가이요마루는 에도막부 소속으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지휘관으로 주력 전투함으로 활약했지만 잠깐의 반짝임 같은 것이었다.
하코다테 전쟁에서 막부 해군이 패배를 하자, 가이요마루는 홋카이도로 이동했고 에노모토는 에조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던 1868년 겨울 폭풍우로 에사시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최신예 군함이 폭풍우에 의해 어이없이 순식간에 침몰해 버린 일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 군함의 침몰로 인해 구 막부군은 하코다테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것으로 에도막부 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가이요마루를 보고 나서 간 곳은 에사시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카모메지마(鴎島)이다. 가이요마루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히야마 도립 자연공원의 특별구역으로 지정된 '카모메지마'는 하늘에서 보면 갈매기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다.
해발 20 미터, 면적 약 0.3제곱킬로미터, 주위 약 2.6 킬로미터인 카모메지마는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원래는 섬이었다. 앞서 설명한 기타마에선의 전성기에 카모메지마는 선박들이 머물기 편한 좋은 항구로 유명했다.
내륙 쪽 해안가에서 섬 중앙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으면, 바닷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고 파도 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섬 입구 부근은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어 섬을 향해 오른쪽은 '마에하마', 왼쪽은 '에비스하마'로 불리고 있다. 에비스하마는 여름철 해수욕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카모메지마는 딱히 이동 동선이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냥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하면 된다. 섬에 들어서면 보이는 또 다른 스폿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높이 10m 이상의 '헤이시이와(瓶子岩)'이다.
이 바위에는 500년 된 전설이 전해지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청어 어업이 청어가 사라져 버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한 노파(점쟁이)에게 마법의 액체가 담긴 병이 주어졌다. 그녀는 그 병을 바다에 던졌고 청어가 돌아왔다. 그 병은 해저에 붙어 바위로 변했고 그때부터 이 지역 어민들은 바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1615년에 상인들이 섬에 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고, 1868년에 이쓰쿠시마 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814년에는 일본 에도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인 마쓰오 바쇼의 기념비가 신사 근처에 세워졌다.
사진에 보이는 저 도리이는 2015년 4월 이쓰쿠시마 신사 건립 400년을 기념하여 이쓰쿠시마 신사 400년 기념 실행위원회에서 헤이시이와 앞에 건립한 것이다.
도리이 맞은편에 있는 저 동상은 에사시의 민요 에사시 오이와케의 장인이었던 아오사카 미츠루(青坂満 1931-2020)의 동상으로 생전 에사시 오이와케의 보급과 교육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 1주년이었던 2021년 7월 14일에 세워졌다. 에사시 오이와케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따로 설명하기로 하고, 마에하마에서 섬의 위쪽으로 올가는 계단의 중간에 무라카미 우물村上の井戸이 있다. 오랫동안 이 섬에 정박했던 청어잡이나 기타마에선들이 보급품을 보충하는 데 중요한 담수 부족 문제를 겪었다. 그래서 1876년 에사시 출신의 상인 무라카미 사부로 우에몬이 상당한 돈을 들여 섬에 우물을 팠다.
섬에서 뻗어져 나간 방파제 쪽에는 과거 기타마에선 교역에 사용되었던 배들의 계류터가 있다. 말뚝의 일부와 말뚝을 꽂는 구멍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계류지 부근에 1986년 6월 14일에 에사시에 기항한 복원 기타마에선 신에츠마루 辰悦丸의 회항 10주년을 기념한 비석이 세워졌다.
섬의 정상부로 올라서면 일단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1889년에 점등한 오랜 역사의 등대이다.
에사시 오이와케 기념비
그 외에 이쓰쿠시마 신사와 캠핑장등을 볼 수 있다. 섬의 정상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일본 석양 100선에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직접 보지 못했다. 카모메지마는 가볍게 돌아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따뜻한 햇살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에사시항 그 앞바다 전체를 볼 수 있다.
이제 발길을 돌려, 에사시 이니시에 가도와 에사시 오이와케 회관으로 향했다. '이니시에(いにしえ)'는 일본어로 '옛날', '태고'를 의미하며, '가도(街道)'는 '큰길'을 뜻한다. 그래서 '이니시에 가도'는 '옛 거리로 이해하면 된다. 에사시는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청어잡이와 히노키(회송나무) 목재 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던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 중 하나로서 이니시에 가도는 당시의 번성했던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운송 창고, 상가 등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홋카이도 최초의 '일본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전선 지중화, 건물 정비등이 이루어졌다.
이니시에 가도와 오이와케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