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약짜개를 사용하면 치약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는 이유
얼마 전 남편이 치약짜개를 화장실에 설치해 놨다. 치약짜개를 보고 나는 '치약을 얼마나 열심히 쓰려고 치약짜개까지 샀을까?'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이 약간의 호기심에 산 것 같다는 결론이.)
내가 아는 치약짜개의 기능은 치약 끝이 남는 것이 아까워 끝까지 짜내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런 걸 아낄 바에 맨날 하는 쇼핑을 좀 덜하는 게 낫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짠순이 기질이 있기 때문에 이 치약짜개가 싫진 않았다. 열심히 치약을 끝까지 짜내보리라..
그런데 웬 걸 몇 달 치약 짜개를 써보니 평소보다 새 치약을 꺼내는 빈도가 높아졌다. 바로 얼마 전에 새 치약을 꺼낸 것 같은데 금방 또 치약을 다 쓴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치약짜개로 인해 한 번에 짜는 치약의 양이 두 배 이상임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엇 왜 이렇게 치약이 많이 나와'라고 생각했었는데 곧 익숙해져서 까먹었었다. 치약이 한 번에 너무 많이 나와서 치약짜개 주변에도 남은 치약이 떨어져 덕지덕지 붙어있기도 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치약까지 짜내겠다는 일념의 치약짜개가,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치약을 낭비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치약짜개의 역설을 마주하고 나니 내 안의 개똥철학자가 깨어났다. (자주 깨어나심)
조금의 치약을 절약하려고 했다가 훨씬 더 많은 치약을 낭비했구나..거기에 치약짜개 비용까지.. 어리석은 중생 같으니라구.
마치 돈을 열심히 벌려고 과로를 하다가, 너무 과로해서 건강을 해쳐 병원비와 건강을 둘 다 잃는, 어리석은 현대인의 모습 같다는 과대해석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럼에도 당장 그 치약짜개를 철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일까? 치약짜개는 너무나 편리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치약뚜껑을 열고, 치약 입구에 칫솔을 겨냥하고, 짜내는 일련의 과정을 단 한 번의 터치로 대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손만으로도 가능한 동작이었다.
이 일련의 동작들이 한 손으로, 한 방에 가능해지니 아기가 너무나 찡얼거릴 때 아기를 한 손에 안고 칫솔질을 할 수도 있게 됐다. 원래는 치약을 짜려면 두 손이 필요한데 한 손만 필요하니, 아기를 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화장실에서 한 손으로 아기안기는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아기가 많이 찡얼거릴 땐 어쩔 수 없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니 치약짜개의 원래 기능은 치약을 절약하는 기능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치약 (끝까지) 짜개 가 아니라, 치약 (편리하게) 짜개 였던 것이다.
치약을 낭비하며 편리함을 얻는다, 이것이 치약짜개의 진짜 기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