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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J씨 Mar 07. 2024

책을 포기하면 못난 걸까요?

세상에 나쁜 책은 없고 무능한 독자는 없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등교를 하자마자 반장이 나를 찾았다.


"J!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여느 여고생처럼 친구들이랑 있으면 세상 시끄럽고 활기차지만, 교실에서 내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그나마 미대를 준비하느라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미술 하는 애'로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야자도 안 해 6시만 땡 하면 미술학원으로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교무실로 선생님이 직접 호출하는 일은 아예 없었다. 그렇기에 어리둥절해하며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웬걸. 나를 보자마자 엄청 화를 내셨다.


"너 독후감을 이렇게 쓰면 어떻게 하니?!"


당황하는 내 모습에 담임선생님은 흥분을 억누르며 말이 이어갔다.


"감정선이 이해가 안 된다고 부정적인 얘기만 잔뜩 써놓으면 내가 이걸 보고 뭐라 해야 할까?"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이라는 소설이었다. 역대 최연소 수상작이라길래 읽어보았는데 기대이하였다. 난 하츠가 도대체 왜 니나가와의 등짝을 발로 차 버리고 싶어 하는지 도통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을 그대로 독후감에 썼는데 그게 문제였던 거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생활 평가에 반영되었던 독후감이어서 담임선생님이 지적을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이야 상사에게 한소리를 들으면 "알겠습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내지 "다음부터 참고해서 작성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때 나는 여고생이었다.


"죄송해요."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지고 심장은 빠르게 쿵쾅거렸다. 엄청나게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책을 비난하면 안 되는 건가? 어떻게든 이 책을 이해해서 뭔가를 깨달아야 했던 걸까? 하츠가 이해가 안 되어도 융통성 있게 독후감을 꾸며 썼어야 했나?


결국 나는 이 날 이후 이해가 안 되는 책은 포기했다. 무슨 내용인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멍청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포기했던 책이 몇 권이 있는데 그중 하나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독서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서 다시 인기몰이하고 있대요."

"지금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있어요."

"호빵만두님은 이 책 들어보셨어요?"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근데 고등학생 때 읽다가 포기했어요."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사실만을 말했는데 부끄럽다. 침묵이 생긴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뭐라도 구구절절 변명이라도 떠들려고 입을 여는 찰나.  


"이해해요. 저도 읽는 내내 답답해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요조가 어디까지 망가지나 궁금해서 끝까지 읽긴 있었는데, 후. 진짜 힘들었어요."


건너편에 앉아있는 닉네임 상어님이 더 빨랐다. 


"저는 오히려 그 답답함에서 위로를 받았어요. 무기력함이 죄는 아니잖아요."


해바라기님이 답하며 자연스럽게 '인간 실격'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주된 주제는 '요조는 대체 왜 이러는가?'였다.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상어님이 그런 내가 신경 쓰이셨는지 질문을 던져주셨다. 


"호빵만두님은 무기력함을 느껴보신 적 있으세요?"


퇴근하고 나서 축 쳐져있는 것을 싫어해 운동을 다녔었다. 무기력함이 나를 덥치기 전에 어떻게든 움직여 털어버렸다. 하지만 무력함에 쌓여있었던 적은 있었다.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떠오르는 건 없지만…. 제일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만났을 때? 실패한 기분도 들고 패배한 기분도 들고 그랬어요."


웃으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 이런 얘기를 언제 해봤더라? 약점을 말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회사에서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어렵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친구들을 만나서도 부정적인 얘기는 최대한 피했다. 


"저도 무슨 기분인지 알아요. 다른 분들도 종종 그런 얘기하세요. 무슨 세뇌 같아요."

"우리나라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학업에 너무 연관시켜요. 책을 읽어야 똑똑해진다고 강요도 하고."


작은 탄식이 나왔다. 몰랐다. 그렇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전공도 이과 문과, 예체능으로 나눠진다. 심지어 공부 방법도 개인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조용한 독서실 막힌 책상에서, 누군가는 교실같이 탁 트인 곳에서, 또 누군가는 음악을 들어야 집중이 잘 된다. 하물며 책은 어떻겠는가? 같은 주제라도 작가에 따라서 해석부터 표현 방법까지 수없이 달라진다.


우린 작가에게서 배워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독자'다. 어떠한 사실과 지식이 있다면 작가는 그것을 단순하게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수없이 생각하고 고뇌하여 자신으로 해석하여 책이라는 작품을 만든다. 그 책을 읽은 것은 독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오로지 독자의 판단이다.


'아, 이 책은 나랑 안 맞네.'


수십 년에 걸쳐 사랑받는 명작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독자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나쁜 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안 맞는 것뿐이다. 읽고 나서 무언가 얻었으면 그 책은 나랑 잘 맞은 거다.  


"인간실격 이번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안 맞은 책을 만났다면 자신을 탓하지 않고 작게 웃으며 덮어버리면 된다. 만약 안 맞은 책이 아쉽다면 아쉬운 대로 내버려두자. 인간은 시간에 의해 흘러가고 나아가는 존재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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