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like list'
"J 씨 고민 있어? 표정이 안 좋네."
박 과장이 파티션에 팔을 걸치면서 묻는다.
"네? 아."
난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자마자 질문을 알아들었다. 어제 야심 차게 독서 모임 참석 댓글을 달자마자 큰 고민이 생겨버렸다. 책! 바로 책!
무슨 책을 가져가야 하나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고르지 못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은 서점에 갔다가 혹해서 산 책 아니면 선물을 받은 책과 아빠가 어쩌다 보니 사게 된 세계문학전집이 전부였다. 대부분 다 읽지 못하고 도로 책장에 꽂힌 책들이고 다 읽은 책들은 무슨 내용인지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재미있게 읽었던 추억의 세계문학전집은 '독서 모임에 가져갈 책'은 아닌 것 같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바로 잠들지 못했다. 읽었던 책 중에 심오하면서 시대를 대변한! 그런 문학 작품이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 내느라 한참을 뒤척였다.
"그냥 어제 잠을 못 잤더니 좀 피곤하네요."
"J 씨 내가 말한 보고서는 문제없는 거죠?"
옆에 있던 안 과장이 슬쩍 대화에 끼면서 업무 확인을 한다.
'저 FM. 인정머리 없는 것.'
"그럼요!"
안 과장은 내가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렸을 때도 예의상 건네는 걱정 따위 없이 바로 현장 진행사항부터 확인한 사람이다.
'같은 동기인 박 과장이랑은 전혀 다르단 말이지.'
안 과장과 박 과장. 나이 차이는 있지만 둘은 입사 동기다. 업무 스타일은 물론이고 외모부터 풍기는 분위기까지 전혀 다르다.
안 과장 - 평균 키에 마른 체격. 날카로운 눈매에 항상 단정하고 깔끔한 셔츠와 구두. 업무 처리 또한 깔끔하지만 그만큼 예민하기도 하다.
박 과장 - 큰 키에 덩치 있음. 화이트 칼라와 캐주얼 사이 아슬아슬 걸쳐져 있는 패션. 융통성으로 일하는 스타일. 맡은 바 일을 잘하지만 엄살이 심한 편이다.
회사 사람들 열이면 열 안 과장이 동생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물론 나도 놀랬다.
"어휴, 오늘 점심은 뭐 먹냐."
한숨 섞인 박 과장 말에 시계를 보니 11시 20분이다. 안 과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가볍게 말한다.
"점심에 짜장면 어때? 좋아하잖아."
"어우, 어제도 먹었더니 물린다. 오늘은 좀 색다른 거 먹으러 가자."
"색다른 거 뭐? 직장인 점심이 다 거기서 거기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인 점심 메뉴가 다채로워봤자 거기서 거기다. 아무리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라도 한정적인 시간에 모험을 하러 떠나고 싶지는 않을거다. 익숙한 맛에 안정적이고 검증된 메뉴가 있는 곳으로 가기 마련이다. 그 맛의 기준이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인 것이 어찌 보면 제일 평범할 수도 있다.
"요 앞에 베트남 음식점에서 쌀국수 어때?"
"웬일이야. 국수는 돈 주고 사 먹기 아깝다며."
안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 과장을 바라본다.
"아, 지난주에 아들이랑 먹으러 가봤는데 괜찮더라고. 아내가 술 구독하는 거 관여 안 할 테니 외식은 무조건 아들이 원하는 걸로 먹기로 했었거든. J 씨 쌀국수 괜찮아?"
"저는 쌀국수 좋아합니다."
"오케이. 그럼 점심은 베트남 음식점으로 갑시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엘리베이터 안이 꽉 찼다. 혼자 먹는 사람들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점심메뉴를 골랐을 것이고 팀원과 함께하는 점심인 경우라면 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의견을 공유해 점심 메뉴를 정하는 분위기의 팀이 제일 이상적이지만 점심 메뉴를 혼자 결정하는 상사도 있다. 상사가 정한 메뉴가 마음에 안 들면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속으로 툴툴거리며 따라가서 먹든지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도망치든지.
'그러다가 종종 맛있게 먹는 경우가 있었단 말이지.'
전 직장이 그랬다. 팀장이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했는데 음식도 무조건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로 먹어야 했다. 입맛도 까다로운 편이라서 차라리 나는 팀장이 메뉴를 결정하는 게 편했다.
그때 시래기국밥을 처음 먹어봤다. 푹 익어서 흐물흐물한 시래기에 된장을 풀어서 만든 시래기 국밥은 내게 너무 생소했다. 고기도 없고 콩나물이나 부추가 들어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국물이 빨개 얼큰하지도 않으니 절대 내가 스스로 먹고 싶어서 주문할 메뉴가 아니었다.
"젊은 애들이 좋아할 메뉴가 아니지만 이게 먹으면 든든하고 속도 편하고 괜찮은 음식이야."
정말이었다. 매번 매콤하고 얼큰한 국밥만 먹다가 삼삼하면서 구수한 시래기 국밥을 먹으니 개운하면서 속이 든든했다.
'책도 그러지 않으려나. 독서 모임에 참석하는 게 사람과 소통을 하고 싶어서잖아.'
누군가와 함께 점심시간을 보낸다고 한다면 상대의 입맛을 존중하고 공유한다는 것. 혼밥을 하면서 알게 된 맛집이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그 시간에 유치하고 어색함은 없다. 조금 낯설기는 하겠지만 처음 잠깐일 뿐이다. 그러다가 안 과장에게 쌀국수처럼, 나에게 시래기 국밥처럼 새로운 메뉴가 'like list'에 추가될 수도 있는 거고 말이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으로 들고 가보자.'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 간단하고 쉬운 고민거리였다.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결정하고 테이블을 세팅하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쌀국수 나왔습니다."
난 첫 독서 모임에 '7년의 밤'을 들고 가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