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를 만들어보자.
"다들 부캐 하나씩은 있잖아?"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에 '부캐(부캐릭터)'가 대화 소재로 나왔다. 코로나 때였나. 연예인들이 부캐릭터를 만들어서 예능이며 음악에서 한참 떠들썩하게 활동했는데 요즘은 또 쏙 들어갔다.
유행이 너무 빠르다, 개그 코드를 못 따라가겠다, 이런 '빠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부캐의 유무라니.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연예인도 아니고."
"부캐가 별거인가. 퇴근 후에 취미 활동하는 자신이 바로 부캐지. J씨는 부캐가 뭐야?"
새로운 접근이다.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잠만보…?"
박 과장은 물론이고 최 대리까지 빵 터진다. 난 머쓱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장난스럽게 대답한 것은 맞지만 다들 너무 크게 웃잖아.
"나도 그랬어. 퇴근 후에는 뭘 못하겠더라. 집에 가면 그대로 뻗는 거지."
"저도요. 옷도 안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진 적도 많아요."
"그럼 두 분은 퇴근 후에 뭐 하세요?"
내 질문에 박 과장과 최 대리는 이때다 싶었는지 줄줄 얘기하기 시작했다.
박 과장 – 부 캐 : 술믈리에.
편의점 ‘네 캔에 만원’에서 술 정기구독까지 온 애주가. 맥주는 물론이고 최근 전통주까지 정기구독을 시작했다. 안주도 배달 음식이 아닌 술과 어울리는 음식으로 직접 요리한다. 과음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최 대리 – 부 캐 : 쇠 드는 안경잡이.
퇴근 후에 사람 만나기 싫어서 헬스를 선택했다. 운동해야 한다는 변명으로 건강이나 챙기려고 했는데 운동이 잡생각은 물론이고 스트레스까지 날려주었다. 이제 운동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서 소규모 헬스 모임을 만들었다.
“요즘은 장도 직접 보러 다녀서 오히려 활동성이 좋아져 다니깐.”
“저도요. 요즘 모임 사람들이랑 헬스 원정을 다니는데 새로운 동네도 가보니 재미있더라고요.”
신나서 떠드는 두 사람 눈동자가 반짝인다. 활기차고 명랑한 에너지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다.
퇴근 후 집에 가는 버스. 음악을 들으며 공허한 마음을 달래 보지만 잘 안된다.
‘나도 이참에 취미나 가져볼까.’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을 하니 익숙한 취미와 낯선 취미가 뒤섞여 우르르 나온다.
‘직장인 취미.’
앞에 단어 하나를 추가해 보지만, 딱히 도움은 안 된다. 나만의 기준이 필요하다.
통장 잔액이 매월 간당간당하니 돈이 많이 들면 안 된다. 무리해서 시작한 취미는 결국 스트레스만 줄 뿐이다.
‘내가 뭘 좋아했더라.’
운동하긴 하지만 좋아해서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한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친한 사람과 마시는 그 분위기와 안락함을 더 좋아한다.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제 무턱대고 놀았다가는 며칠을 고생할 나이다. 단순히 즐거운 놀이와는 달랐으면 좋겠는데.
좋아하는 것을 찾으러 점점 과거로 간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아, 책 읽는 거 좋아했는데.’
학창 시절 만화책은 물론이고 소설책도 좋아했다. 내신 성적을 위해 의무적으로 써야 했던 독후감 외에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책에 별도로 독후감을 썼었다.
책. 잊고 있었다.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하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최 대리와의 대화.
“혼자 운동하는 게 편하지 않으세요?”
“편하기는 혼자가 편하지. 근데 같이하면 더 즐겁더라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왜 편하고 왜 즐거운지 알겠다.
‘XX동 독서 모임.’
없다. 나오는 건 논술 학원 아니면 언어영역 파헤치기. 학업에 관련된 사이트뿐이다. 나갈지 말지 결정도 못 하게 아예 선택사항이 없으니 아쉽다.
‘ㅇㅇ동 독서 모임.’
“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사가 있는 동네로 검색해 봤는 데 있다! 심지어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독서 모임이 진행하고 있었다.
삐-
하차 벨을 누르자 버스는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날 내려줬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어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설렘이다.
평일 독서 모임 시간은 7시 30분, 장소는 회사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카페다. 퇴근 후 간단한 요기를 하고 가기 딱 좋다.
내 모든 상황에 딱 맞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독서 모임에 가입하기로 했다. 별다를 것도 없고 색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하루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