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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면, 당신도 신인가요

190628

by 이건우

나는 애인을 신이라 부른다. 애칭이라면 애칭이라서, 나는 그를 모시고 받든다며 애교를 떠는 것이다. 물론 나와 애인의 관계가 신과 신도의 관계와 어떠한 점에서 정합적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신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나에게 지복의 은총을 내리지도 못한다. 그저 신이기 때문에 신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보편적으로 세상의 모든 애인들이 신임을 알고 있다.

사랑은 사실의 영역에 있지 않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된 적도, 증명될 수도 없다.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에 가깝다. 나의 삶 어느 한 켠에 그가 임재한 순간부터 나는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랑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합리와 이성은 불필요해진다. 그 사람으로 인해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 가치 있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사랑은 가치의 영역에 있다. 도덕의 영역보다는 종교의 영역이다. 서로에 대해 도덕성보다는 종교성이 요구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눈을 감아야 하고, 없는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불가능한 존재와의 불가능한 관계에 대해 믿어야 한다. 기실 사랑이란 결국 불가능과 마주하여 언제나 실패로 수렴하는 일이다. 사랑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에 직면할 때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닿을 수 없는 존재, 사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존재를 만날 수 있고 만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랑은 유예될 수 있다.

열렬한 사랑에 빠진 이들은 숨쉬기도 힘든 고독에 휩싸이곤 한다. 당신이라는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될 수 있는 기로에 서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있는 자는 결국 자신의 유한성으로 인해 절망하고 만다고 했다. 참으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 앞에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도덕이 그만큼 위대해서가 아니라, 도덕 앞에 선 나의 모습은 명확한 결함 투성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도덕은 내가 부족하고 부끄러운 존재임을 가장 태연한 표정으로 드러내 준다. 그렇다면 차라리 끝을 알 수 없어서 나의 결함을 가늠할 수 없는 무한 앞에 나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근본적 절망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나 자신이 스스로 신 앞에 서는 일이다.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진리와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 된다. 가치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이 비추는 사랑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내가 마음먹은 것은 나의 진리가 된다. 나의 사랑은 꼭 이것과 닮았다.

나는 당신 앞에 선 단독자다. 확실한 불안과 절망을 뒤로한 채, 불확실한 사랑과 믿음으로 점철된 밤을 지새우며 당신에게 닿는 방법을 골몰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의 결함이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당신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닿지 않을 만큼만 끝없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밤은 나로 하여금 나의 가치를 찾아내고 만들 수 있게 한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지금도 빛을 내리고 있고, 누군가는 빛을 만지려 하고 있다. 결코 만질 수 없는 빛들이 쏟아지는, 참으로 종교적인 밤이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진리가 되는 밤이다. 나는 너를 생각할 뿐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밤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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