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랜덤 재생은 나를 계속 계속 많아지게 하고

190620

by 이건우

어떤 노래는 과거 어느 시점의 나를 불러세운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간다기보다는 과거의 어느 시점의 내가 지금 여기로 온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나는 그만큼 많다.

Grouplove의 Itchin' On a Photograph가 MP3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2019년에도 MP3에 파일을 집어넣고 유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구식 인간이다. MP3에는 수많은 내가 있고, MP3로 음악을 들으면 무작위로 무수한 나들 중 한 명이 등장하게 된다. 그게 좋아서 아직도 구식 인간인 채로 산다.

Grouplove는 2014년 여름의 나를 불러세웠다.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 대학 생활을 경험하고 처음 대학생의 방학을 맞이하여, 처음 대학생 신분으로 본가에 내려가 있던 때였다. 절대적인 무료함이 순수한 무료함이었던 때, 나는 내 방이 없어서 소파에서 생활했다. 그게 다였다. 나는 그 친구와 같은 사람이지만, 너무나 다른 사람이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페이스북이나 보고 있던 나에게, 5년 후의 나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 친구는 말이 없다. 다음 곡으로 넘어갔고, 그 친구는 여전히 소파에 누워 페이스북을 보고 있을 것이다. 앨범 속 사진을 만져보듯 재생목록을 뒤져본다. 불가능한 대화를 시도하는 일은 어쩐지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Jason Mraz는 2009년 여름, Sigur Ros는 2012년 겨울이며, The Fray는 2015년 봄이다. Damien Rice와 Mogwai와 My Bloody Valentine에는 거의 모든 내가 있다. 간혹 나와 비슷한 밴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마주하면 무척 반갑지만, 그때의 내가 납치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한편으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그래서 Damien Rice와 Mogwai와 My Bloody Valentine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모든 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을 깊게 사귀는 것을 기피하려는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나를 불러세우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자동으로 브금이 깔려 의도치 않게 영화처럼 미화가 되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Cigarette After Sex를 들었고, 나는 계속 계속 많아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구성하는 나는 아주 많아져서, 나 자신이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때에도 간신히 수명을 유지한 MP3로 노래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 될까. 어떤 내가 나타나 말없이 브금을 깔고 있을까. 물론 그때에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2009년 여름의 나도, 2012년 겨울의 나도, 2014년 여름의 나도, 2015년 봄의 나도 모두 아름다웠다고 MP3가 귀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여름의 나는, 아름다운 나였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엇이 남든 무엇이 쌓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