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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01. 2022

'일상'이란 말이 가진 이중성

 지난 이태원 참사 이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왠지 모르게 축 가라앉아 있다. 너무도 많은 관련 뉴스들을 접해서 마음이 아주 울적한 탓일 수도 있다. 해야 할 일들은 쌓여 있지만, 솔직히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온라인 수업, 사실 이런 마음 때문에 갈까 말까 무척 망설였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울 기분도 아니고, 하하 호호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기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이미 몇 주 전에 잡아 놓았던 온라인 수업이라 무거운 마음을 부여잡고 참석했다. 온라인 방엔 이미 많은 분들이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밝은 표정으로 요즘 근황을 자기소개 삼아 발표시켰고, 참여자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과 소망에 대해 풀어놓았다. 그중 나처럼 무거운 표정으로 참석하고 있던  한 분이 이태원 참사를 언급하며 이번 수업에 들어올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뉴스에서 본 그 사건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얘기한 후, 바로 다음 발표자로 나를 지명했다. 나 역시도 이태원 참사로 마음이 심란해서 수업 참여를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분위기에 맞지 않은 말을 꺼낸 걸까?’ 순간 아차 싶었다. 괜히 즐거운 수업 분위기를 흐릴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현재 슬픔을 집단 망각으로만 덮어 두려는 분위기가 얄미워 고개를 빡빡이 세웠다.


 항상 이런 큰 비극이 있고 난 뒤에 사람들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힘들지만, 일상으로 빨리 복귀해야지’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나 역시도 그랬다. ‘일상’이라는 말이 큰 비극을 겪은 후에 모든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마법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껏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저도 모르게 이런 말들이 내뱉곤 했다. 그래야 그 사람의 상처가 아물고 모두가 향유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은 쓰리고 얼굴 눈물로 붉게 부풀어 올라도 일상생활을 해야만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큰 비극을 겪은 사람이 ‘일상’, 즉,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현재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아니 그러려야 그럴 수가 없다. 예전 가까운 한 사람이 세상을 달리했다. 그렇게 큰 슬픔을 겪었을 때 가장 이해하기 안 되는 상황이 바로 이런 모순된 현실이었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하게 웃고 즐기며 현재 삶을 즐기고 있는 모습, 그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다들 웃고 있는 저 밝은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이미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입은 나는 그 속으로 움직이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만든 커다란 벽 속에서 홀로 버티고 마음이 단단해져서야 겨우 그들의 무리 속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일상이란 말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극이 아물 시간을 가지고서야 가능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그 일을 겪지 않았고, 그 희생자들이 아는 누군가가 아니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도 너무 부끄럽다. 내 주변에 그런 희생자들이 없다고 그 일을 마음 깊이 추모하기보다는 일상에만 바로 몰두하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어제 수업에서 불편했던 이유는 바로 그 점이었다.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지 않고 수업이 진행된 무신경함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놀라셨나요?”, “그런 일이 있어 참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라는 인사말 한마디였다면, 공감받는다는 기분이었다면 이 수업이 마냥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이해와 공감 없이, 준비된 수업이 기계적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에 마냥 불편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나도 수업을 받는 학생들에게 주말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를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런 말의 되새김은 아이들에게 큰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제의 그 수업에서는 참여자가 모두 성인이니 한마디의 위로와 공감을 서로 나누어도 좋지 않았을까? 슬픔은 나눌수록 반이 되니까 말이다.


 평범한 일상으로의 안전한 복귀는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는 연대 의식,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다는 공감이 밑바탕이 되어야지만 가능하다. 그런 감정들을 싹둑 잘라버리고 바로 일상으로의 복귀는 너무 힘겹다. 큰 아픔을 겪은 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은 것은 그들이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 준 탓이다.


 같은 아픔으로 겪고 같은 슬픔을 가진 자들이 사용하는 ‘일상’이라는 말은 마냥 잔인하지 않다. 그래야 아픔을 묻고 다시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공감 없이 바로 ‘평범한 일상’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너무 잔인하다. ‘산 사람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은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마음을 추스를 시간, 추모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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