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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9. 2022

축구경기에서의 '경우의 수' 계산, 이제 그만하고 싶다

 대한민국과 가나와의 축구 경기가 있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일찌감치 치킨집에 들러 막내가 좋아하는 새우 양념치킨을 주문했다. 또다시 생각지도 않았던 지출이다. 운동을 그렇게 즐기지 않으면서 왜 축구 경기를 볼 때는 치킨부터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축구 경기를 볼 때면 치킨과 맥주를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든다. 몇십 년 전, 붉은 열기로 뒤덮었던 “대! 한! 민! 국!”의 가슴 떨렸던 추억이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애써 포장해 온 치킨은 저녁으로 먹느라 정작 진짜 축구 경기 때는 뜯지도 못했다.


 바야흐로 카타르 월드컵 시즌이다. 회사 일에 분주한 신랑도, 공부에 바쁜 고등학생인 큰 애도 대한민국과 다른 나라와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파에 몸을 푹 파묻은 채 선수들의 경기 운영에 훈수를 두기 바쁘다. 가나와의 경기도 큰 애가 집에 있었다면 치킨을 열심히 뜯으면서 아빠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날은 오로지 축구를 보던 남편의 탄식과 고함으로 온 집안이 시끌시끌했다. 사실 난 축구 경기를 잘 보지 못한다. 20년 전 2002년 월드컵에서 너무도 많이 심장이 떨리는 순간들을 직접 본 탓인지, 평온한 마음으로 축구 경기를 보기가 두렵다.


 방문을 닫고 다른 일을 하며 축구 경기 진행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자니, 여러 번 남편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아, 대한민국이 지고 있구나.’ 그러다 어느 순간 아파트 전체에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20년 전, 붉은 옷을 입고 광화문광장에서 소리 질렀던 것처럼, 사방이 시끌시끌하기 시작했다. ‘음, 이제는 이기려나 보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생각을 마무리하려던 차에, 또다시 남편의 안타까운 탄식이 연신 들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경기 결과가 짐작되었다. ‘아, 졌구나.’ 2022년 11월 28일, 대한민국과 가나와의 경기였다.


 축구 경기 다음 날 결과를 확인해 보니 대한민국이 가나에 2대 3으로 졌다. 각 신문들은 어제 있었던 경기 운영을 분석하며 앞으로 있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경우의 수를 따지기 시작했다. 월드컵 H조에서 대한민국이 16강에 들 경우는 축구 경기에서의 우루과이와 가나와의 경기 결과도 꼼꼼하게 분석해야 하기에 좀 복잡하다. 신문들마다 ‘우루과이가 가나를 이길 경우와 비길 경우’, ‘우리나라가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이길 경우’ 등등 여러 가지 승점과 확률을 분석해서 대한민국의 16강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또다시 축구 경기에서 경우의 수 분석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학을 잘하는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근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지 못하고 하늘로 공을 ‘뻥뻥’ 차대는 통에 ‘펑 축구’라는 악명을 지녔던 한국 축구였다. 예전 우리나라 축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 가지였다. 선수의 머리 위로 피가 흘러도 무조건 경기를 진행하는 ‘투지의 축구’와 경기에서 지고 난 후 여기저기 머리를 굴려 가며 승리의 경우를 따지는 ‘경우의 수, 축구’였다. 항상 큰 무대에서 다른 나라들과 경기를 할 때마다 원하는 경기 결과를 볼 수 없었다. 매번 축구 경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떨렸고 화가 났고 안타까웠다. 그런 복잡 미묘한 기분을 싹 가시게 해 준 ‘카타르시스’와 같은 경기가 일어났던 월드컵이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국민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시작 전에는 ‘정말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달라진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우리는 광적인 희망을 느꼈다. 16강, 8강, 4강으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승승장구하자 국민들은 비로소 ‘생전 처음 축구에서의 자신감’을 느꼈고 신바람 나게 일을 했다. 붉은 옷을 입고 출근해도 회사 사람들은 웃으며 서로를 대했고, 축구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행진으로 길거리가 막혀도 웃으며 인사했다. 뜨거운 붉은 열정으로 물들었던 관용과 광기의 시절이었다.


 20년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 또다시 우리는 16강 진출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전에서 이길 경우, 우루과이가 이길 경우와 비길 경우 등등 수많은 숫자와 상황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2022년, 대한민국의 현재 축구는 부상을 당해도 쉬지 않고 ‘부상 투혼’으로 경기에 참여해야 하고, 한 경기를 지고 난 뒤에는 경우의 수를 여전히 따져야 한다. 얼마 전까지 유럽 리그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훈훈한 소문들만 들었는데, 2022년 월드컵에서의 대한민국의 축구의 모습은 고리타분한 모습 그대로다. 무엇이 문제일까? 두텁지 못한 선수층? 관리 부재? 경기 결과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민심? 알 수 없다.


 20년 전, 인맥, 학맥으로 두꺼운 대한민국의 축구계를 자기만의 뚝심으로 헤집어 놓았던 히딩크 감독이 생각난다. 적어도 그만은 ‘감 내놔라, 떡 내놔라’라고 훈수 두는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오로지 밑바닥에서 선수들을 발굴했고 빛나는 명성과 학벌을 무시하고 팀 안에 적정한 인물들을 채워 넣었다.


 그 시절의 히딩크 감독이 만들었던 2002년의 마법처럼 다시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바꿔야 할까? 둘러보니 산적해 있는 문제 투성이다. 축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사회 곳곳에 눈에 띈다. 과연 해결할 의지는 있기나 할까? 아마도 또다시 문제들이 차곡차곡 쌓인 채로 우리 사회는 또다시 흘러갈 것이다. ‘싹 다 갈아엎기’에는 너무 피곤해할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이미 20년 전에 없어졌다고 생각한 ‘뻥 축구’, ‘경우의 수’의 축구 승점 계산이 다시 도래한 것처럼, 어둑한 과거의 유산이 오늘날의 사회를 덮는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싹 바꿀 의지’가 없는 한, 우리 축구는, 우리 사회는, 우리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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