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아, 그 말 멈추어 다오.

by 하늘진주


내가 좋아하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주인공 바틀비는 일을 시키는 상사 앞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며 일하기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기 드문 바틀비의 뚝심에 놀라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만일 바틀비에게 토끼 같은 아내가 있고, 강아지 같은 자식들이 있어도 그렇게 뚝심 있게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유난히 고집이 세고 주관이 강한 남편은 세상의 모든 일에 불평이 많다. 조금이라도 불공평하다 싶은 상황에서 목소리 높이기를 꺼리지 않는다. ‘투사’처럼 잘 싸우고 화도 잘 냈다가 사르르 풀어지기에 가끔은 불독과 푸들을 한꺼번에 키우는 느낌이다.


얼마 전부터 남편은 ‘자신이 꼰대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회사 내 후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거였다.

“너희가 말이야, 그걸 가지고 어렵다, 힘들다고 말하면 어떻게. 나 때는 말이야.”

“나 때? 그건 이미 꼰대의 시작인데. 당신 꼰대 맞네.”

그러고는 남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제발 자기 속마음을 후배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안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꼰대 짓을 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표정으로 자연스레 나올 텐데, 괜히 섣불은 말로 미움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남편이 갑자기 회사 내의 일에 대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바이러스에 민감한 시기에 남편 팀만 모든 회의를 대면 회의로 바꿨다는 이야기였다. 이른바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팀 내 규칙의 전환이었다. 남편은 회사 전체적인 분위기는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비대면 근무를 일정한 비율로 유지하라고 하는데 자기 팀만 독단적으로 바꾸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일의 효율성과 감염의 위험성’,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침을 튀기며 온종일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토론 주제이다. 서로 간의 견해 차이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던 ‘방역 패스’도 흐지부지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소주 한잔 걸치며 연신 투덜대는 남편의 목소리에 나는 TV를 보며 건성으로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좀 불편하긴 하겠네."

그러다 남편이,

“내가 한번 대표로 말해볼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표로 말해본다고? 안되지. 절대로. Never!

나는 남편을 붙들고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나서지 말고, 혹시 솔선수범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그 뒤에서 묻어가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뚝심 가득한 신랑이 욱해서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마 혈혈단신 과거에 태어났으면 대장군이든, 독립투사든 한 자리 차지하며 천하를 호령했을 것 같은 우리 남편, 그는 여우 같은 아내와 먹성 좋은 아들들을 가진 죄로 오늘도 입을 꾹 다물어야 한다. 조선 원경왕후 민 씨는 이방원의 큰 거사를 앞두고 갑옷과 병장기를 챙기며 집안은 생각하지 말라 안심시키며 지아비의 큰일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원경왕후 배포를 조금도 닮지 않은 소심한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껄끄러움 앞에서 남편의 뚝심을 꾹 누르고 가정을 생각하라며 비굴하게 덧붙인다. '님아, 그 말 멈추어다오.'

일주일에 한두 번 초록빛 소주 한 병을 따고 홀로 만두를 찌는 남편의 뒷모습이 쓸쓸하기만 하다. 밤에는 속이 더부룩해서 절대로 야식을 못 먹겠다는 아내 앞에서, 아빠의 안줏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먹성 좋은 아들들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 그래도 내가 입을 다물어야 우리 똥강아지들 만두 하나 더 사줄 수 있겠지’

한두 잔 들어가는 술잔 속에, 아이들에게 만두 더 이상 집어 먹지 말라고 소리치는 남편의 호통 속에 그런 속내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바틀비의 발언은 최고의 사치요, Flex다. 매달 월급날만 기다리는 근로자 처지에서는 바틀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모던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서류 가방을 집어 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대고 생각한다.

'남편아, 우릴 생각해서 제발 오늘 하루도 잘 참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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