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배가 아프다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다녀왔습니다’를 큰소리로 외치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아이이다.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일까? 학원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며칠 전에도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고 수업을 온라인으로 돌려서 했더랬다. 그날 봤어야 할 시험을 대신 치르고 왔을 터인데, 하얗게 질려 온 것이다. 품에 안을 수도 없게 장성한 아이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흐느꼈다.
아이의 배를 쓰다듬어주며,
‘배는 좀 괜찮니?’
‘(끄덕이며), 배는 좀 덜 아파요.....’
‘뭘 잘 못 먹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스트레스받는 일 있었니?’ 하고 물으니, 그제야 아이는 훌쩍이며 말을 했다.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몸도 자꾸 아프고.....
엄마!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시험을 잘 보고 싶은 마음은 앞서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 보니, 더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학원에서 시험문제를 풀다 스트레스성 위염이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아이에게 묻지는 않았다.
중학교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은 각자 특출나게 잘하는 분야가 있다고 했다.
‘엄마, 승빈이는 컴퓨터 전문가에요, 컴퓨터 부품을 사다가 혼자 조립도 다 해요.
중건이는 자전거 마니아고요,
승재는 영재고 간데요!.’
아이는 친구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불안감이 커졌던 것이다.
‘누구나 다 잘하는 게 있어~, 아직 못 찾았을 뿐이지.....’
‘그걸 찾는 고민이 많아 사춘기인 거야!, 고민되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하며,
‘엄마도 너 나이 때는 아무것도 몰랐어~’로 운을 떼었다.
‘그래요?’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조금은 편안해진 듯했고, 그 나이의 엄마가 어땠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던 십 대 때의 나는 부잣집 친구가 예고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에 부모님께 플루트를 배우겠다고 선언했었더랬다. 피아노는 치기 싫어서 엄마 속을 썩였지만, 플루트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빛을 반짝이며 선율에 몸을 맡겨 고운 소리를 내는 플루트를 불면 내가 멋있어 보일 것 같았던 이유가 더 컸다. 이런 철없는 딸을 믿고 지원해주신 부모님 덕분에 재능은 없었지만 악기를 배울 수 있었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관현악부에 들어가서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그때의 나처럼 아이가 철없이 무언가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그러셨듯이 선뜻 '그래 해보려무나' 하고 지원해 줄 수 있을까? 혹시 그게 프로 게이머라던가, 카레이서라던가 한다면... 흔쾌히 해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40대의 내가 느끼는 노년의 불안함과 비례하여 내 기준에서는 모험처럼 느껴지는 그런 일을 아이가 하고 싶다고 한다면, 흔쾌히 허락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는 아이가 코딩을 다시 해보겠다고 하면 어떨지..... 디자인 쪽이나 영상 편집 쪽을 하면 아이가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이외에 내 기준에서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것들을 아이가 한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게도 마음의 준비나 기준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자기가 처했던 환경과 살아온 경험으로 상황을 판단하게 되듯이, 남편은 뚜렷한 목표 없이도 공부를 잘했던 본인의 경험에 빗대어 아이를 판단하곤 한다. 남편은 할 것이 없고 심심해서 책을 읽다 보니 공부가 재밌어져서 학업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궁둥이 붙이고 참고하다 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주의이다.
반대로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 보고 판단하는 성향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잘 모르겠으니, 우선 저지르고 본다. 아이는 어떤 성향일까?
지금의 내가, 이제 와서 글을 쓰고, 온라인 세상을 뒤지며,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도 어떤 것이든 시도해보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제적으로 너무 무리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경험해보라고 지원해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질풍노도(거친 바람과 화난 파도)의 시기를 겪으며, ‘불안’을 느끼는 아이에게 ‘기특하다고,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어야겠다.
그러고 보니 아이뿐만 아니라 나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불안감에서 시작된 것이다. 불안감이 없었다면, 회사에 속한 내가 아닌, 홀로 설 수 있는 나를 찾고자 하는 시도 조차 없었을 것이다. ‘안정적이다’라는 상태는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지만, 때로는 '불안'이라는 상태로 인해 변화를 꾀하고 새로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