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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밤

잠은 안 오고.

겨울 가뭄을 보내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단비가 내렸다.

강한 바람을 지닌 스톰이 지나가면서 산사태와 홍수도 났다.

작년 여름 산불로 많은 곳이 타버린 산타 크루즈 쪽이란다.


유난히 따스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날들.

날이 따뜻하면 겨울인데 날이 따뜻하다 불평을 하고 비가 내리지 않으니 올 한 해도 가뭄으로 고생을 하겠다고 한 걱정을 해대다가 막상 기온이 내려가고 비가 내리니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며 혼자서 툴툴 댄다.

참 나란 사람은 이상한 아줌마 인가보다.


웅크리고 있다가 뜨거운 국화차를 우린다.

따뜻한 차로 몸도 풀고 마음도 풀고 싶어서 국화를 한 움큼 집어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 마른 국화꽃들이 물을 머금어 살아나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뻣뻣해진 내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다.

따뜻한 차가 추워 굳어진 몸을 데워준다.


나무로 만든 집 지붕에 내리는 빗방울 소리.

날이 바짝 말랐던 수개월간 참으로 듣고 싶었던 그리운 소리이다.

멀리서 난 산불로 타는 냄새가 가득해 창문 조차 열지 못하고 지냈던 늦은 여름부터 목마르게 기다렸던 비가 내는 실로폰 소리.


늦은 저녁에 나가서 동네를 한 시간 걸어야 겨우 잠이 드는 갱년기 불면증.

비님이 내리니 나가지를 못해서 오늘의 활동량은 바닥이다.

그러니 오늘 밤엔 더더욱 머리가 맑다.

고로 잠들기가 아마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긴 밤 음악이 되어 주겠지.


7년이 넘어가는 미국 생활.

몸은 한국의 계절에 맞춰져 있어서 비가 그치는 삼월부터 새 비가 내리는 12월까지 늘 비를 그리워한다.

물론 이 비가 눈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건조한 캘리포니아에서 늘 비 내리는 날을 그린다.


수험생 시절.

여름 방학 내내 화실에 박혀 그림만 그려대던 어느 날.

근처 분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길에 만났던 굵은 소나기.

피할 데도 없어 그냥 비를 맞고 화실로 뛰어가다가 친구들과 함께 화실 현관 앞에 크게 고여 있던 물 웅덩이에서 철벅거리며 내리는 비를 맞았다.

여자애들 몇 이서 내리는 빗속에 정신없이 깔깔대며 물웅덩이에 발을 텀벙댔다.

가슴에 무겁게 맺혀있던 무언가가 내리는 폭우에 쓸려 내려감을 느꼈던 신기한 경험.

입시 스트레스를 폭포처럼 쏟아지던 비로 잠시라도 풀 수 있었던 그 여름.


화실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던 선생님이 “저 아이들이 드디어 미쳤구나” 하셨단다.

그렇게 빗속에서 ‘미친 듯이’ 웃으며 놀았더랬다.


그때부터 비는 내게 감정의 탈출구가 됐던 게 아닐까.

그래서 늘 비가 그립다.


그립던 비가 지금 내린다.

그리운 게 비일까 아니면 장대비 속에서 까르르 웃고 놀던 어릴 때의 나일까.


비가 내린다.

수줍은 듯 지붕을 두드리는 귀한 비가 내린다.

날은 쌀쌀해도 창문을 조금 열어둔다.


내리는 빗소리가 나무 담을 두드리고 지붕을 두드리고 마당을 두드린다.

소리라도 담아두고자 창문을 열어둔다.


비가 내린다.

창문을 열어두니........ 춥다.  


코로나 시대에 병원도 다니기 힘든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싶어 다시 창문을 닫는다.

낭만을 현실이 이겨버리는 슬픈 나이가 됐다.


비가 내리는 고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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