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
인적이 드문 병원 뒷마당에 가면 장기입원환자 보호자들이 집에 있는 빨래거리를 싸들고 와서 빨고 너른 풀 숲에 널어두곤 한다. 보통은 그렇지만, 오늘처럼 입원 중에 초상이 나는 날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전에 내과병동에서 사망한 남자환자의 보호자들은 병원 뒷마당 커다란 나무아래 울고 있었다. 그는 말라리아 합병증, 장티푸스와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하였다. 한국이라면 이런 진단명으로 환자가 사망하지 않기에 낯설고 믿기 어렵지만, 평균 연령이 48세 정도인 현지 환자들은 말라리아 합병증, 에이즈 합병증, 기생충 감염등 풍토병과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어간다. 입원환자, 가족들은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아픔이라는 생각 때문에 모르는 사이여도 서로 함께 울고 슬퍼하며 애도해 주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서인지, 매일 지나가다 멈춰 서서 보곤 하는 병원 뒷마당의 평화로움은 현지인들의 슬픔을 상징하는 것처럼 역설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이 병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나는 생각한 적이 있다.
말라리아로 사람이 죽어? 말라리아가 그 정도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 약을 제때 투약하지 못해 죽고 더 작은 마을들에서는 말라리아인 줄도 모르고 죽는다는 객관적 데이터가 있음에도, 나의 경험에 비춰 형성된 선입견은 말라리아를 그런 병까지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런 무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될 날이 올 줄 모르고 말이다.
어딜 가나 누구보다 먼저 모기에 물리는 단내 나는 피를 가진 나는, 갖가지 종류의 모기에 물리며 말라리아에 벌써 3번이나 감염되었는데도 여태 잘 살아있으므로.
카메룬에 살면서 세상에 모기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시커먼 모기부터 현지인들도 무서워한다는 '무뜨무뜨'라 불리는 유령모기까지.
무뜨무뜨는 분명히 모기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 가려워서 문지르다 보면 팔다리에 물린 자국이 스르륵 나타날 때 소름 돋는다. 그리고 미치도록 가렵다.
긁지 않으면 괜찮을 수 있는데,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다. 못 참고 긁기 시작하면 진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무뜨무뜨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오후나 저녁시간 이동할 때는 무조건 긴팔을 주로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무더운데 덥지 않냐 하겠지만, 사하라 이남 지역인 이곳의 사막성 건조한 더위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있고 모기에 덜 물리기도 했기 때문에 효과는 있었다.
'아, 머리야. 또 걸렸나?'
말라리아가 내 몸에 침투했다는 알람소리 같은 이 생소한 두통은 말라리아에 걸릴 때만 있는 두통인데,
며칠 전부터 있었다. 열은 없다. 타이레놀로는 두통이 잡히지 않으며 밥맛이 없고 기운이 쫙 빠지던 날, 수도에 있는 행정원에게 상태보고를 했다.
수도 야운데에 올라가 말라리아 검사를 받기로 했다. 물론 바푸삼 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과를 믿을 수가 없으므로 지역에 흩어져 파견된 단원들은 수도에 있는 프랑스인 내과 의사가 있는 병원이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진료소에서 검사를 받곤 했다.
오전 일찍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대기의자에 앉았다. 말라리아 검사를 기다리는 나 외에 동양인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중국사람인가(*수도에서는 아시안 중에는 중국사람을 많이 마주치므로) 싶어 인사하고 보니, 일본 대사관 직원이라고 했다. 증상은 나랑 비슷해 보였고 둘 다 기운은 없었지만, 현지 살이에 대한 농담도 주고받으며 대화할 수 있는 컨디션이었다. 나도 그도 한두 번 걸리는 말라리아가 아니라서, 검사하고 양성이면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낫겠지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일본인이었는데, 말이 많지 않고 예의가 발랐다.
결과는 빠르면 다음날 전화로 연락을 준단다. 증상이 있으니. 양성 확인 전까지 현지에서 흔하게 먹는 진통제 Paracetamol을 처방받고 수도 단원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이게 뭐라고 모기 하나에 커다란 내 몸뚱이가 맥을 못 추게 머리도 아프고 기력도 빠진단 말인가?
내가 알고 있던 말라리아는 한국에서는 '삼일열'이라 부르는 그리 치명적이지 않은 경미한 증상으로 전공책에서도 몇 줄 소개 안 하는 질병이지만, 열대기후 지방에서의 말라리아는 'Palciparium'이라 부르는 말라리아 충이 혈관을 타고 여러 장기를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질병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도 티브이 프로그램을 촬영하느라 아프리카 밀림을 체험하던 한 연예인이 말라리아로 죽었고, 그전에도 그런 일들은 많았는데 내 주변엔 없었기에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여행 온 게 아니고 적응하고 살아야 하니까 하면서 말라리아 예방약도 먹지 않고 왔고, 사실 홈메트를 켜놓고 사는 것 외엔 모기장도 안 하고 지내온 것을 생각해 보면 말라리아에 대해 무지한 나는 그저 용감하게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역시 말라리아 양성이었다.
주사약도 있고 먹는 약도 있는데 꽤 비싸다. 현지인들은 이 약을 살 돈이 없어 버티다 합병증으로 많이들 죽는다. 병원에 들러 주사를 맞았고 앞으로 몇 번 더 맞을 약을 받아와서 self injection을 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들은 소식은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그 당시 나와 같이 검사를 기다렸던 일본인은 다음날 새벽 말라리아 충(Falciparum)이 뇌혈관을 타고 올라가 뇌사 상태로 JAL기에 실려 갔단다.
세상에나!!! 정말 이런 병이었어?!!!!!!!!!!
둘 다 말라리아 양성이었는데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뇌사라니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일본인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뇌사상태로 실려갔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너지고 슬퍼지며 혼란스러웠다. 나는 마치 죽다 살아난 사람 같았다. 벌써 3번째 감염이면서도 한국의 감기 같은 말라리아 정도로 치부했는데, 그 말라리아 충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다가 간에 종착하기도 하고 뇌로 가기도 한다는데, 나랑 몇 마디 이야기 나눌 때 멀쩡해 보였던 사람이 뇌사가 되었다니 말라리아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아프리카 풍토병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인간 그 존재의 가벼움,
대단한 만물의 영장 같지만, 모기가 전하는 미물에 의해 생과 사가 갈리기도 하는
그래서 허세 떨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삶 뒷면에 죽음이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하나 보다.
그가 죽지 않고 제발 회복되어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꼭 살아나기를......
나 역시 임기를 마치기까지 꼭 살아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