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Tim Hortons

by 아궁이

미국에 스타벅스가 있다면 캐나다에는 팀 홀튼이 있다.
아이스하키가 유명한 캐나다를 대표하는 아이스하키 선수 팀 홀튼이 자신의 이름을 따 1964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처음엔 도넛으로 유명한 카페였다니, 그 명성과 노하우가 벌써 60년을 훌쩍 넘겼다. 커피와 도넛 장인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다. 서울에도 몇 군데 매장이 생겼다는데, 한국 진출은 2023년부터 시작되었다니 꽤 늦은 편이다. 워낙 스타벅스의 위세가 강해서일까.


프랜차이즈 카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이 나의 하루 커피 한 잔 원칙이지만, 캐나다에 왔으니 팀 홀튼 커피는 마셔줘야지.


문득 2006년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TESOL 수업을 들으러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대왕 도넛을 앞에 두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그룹 과제를 하던 시간들. 무려 80시간의 ESL 교사 실습을 했는데, 수업 전마다 긴장으로 아프던 머리를 단번에 낫게 해 주던 건 달디단 도넛 한 입이었다. 그 도넛과 함께 무사히 과정을 마쳤다.

그때는 제3 국으로 가 의료봉사를 하며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다짐하며 공부했지만, 이후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 자격증은 지금도 장롱 어딘가에 있다.


팀 홀튼 코퀴틀람점.
평일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매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원두가 갈리는 소리, 진한 에스프레소 향, 조금 습한 실내 공기와 여러 언어가 섞인 대화 소리가 활기찬 아침을 알리는 요란한 알람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메뉴판에서 ‘New’ 표시가 눈에 띄었다. Protein latte.
커피에 단백질을 넣은 메뉴가 인기라는 걸 보니, 확실히 건강을 중시하는 나라다 싶다.

가격은 4.99달러. 카페에 앉아 글을 좀 쓰다 갈 생각이라 세금 포함 5.49달러를 결제했다. 숫자만 보면 합리적인데, 세금이 붙는 순간 한국의 비싼 커피값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나라의 tax 옵션은 늘 나를 망설이게 한다.


15%, 18%, 20%, 25%, 그리고 Custom.

Custom을 누르고 내가 주고 싶은 만큼 내면 되는데, 그게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결국 쿨한 척 15%를 누르고, 마음속으로는 아까워한다. 이것도 현지 문화 적응의 일부일까. 언제쯤 이런 선택 앞에서 자유로워질지 모르겠다.


정해진 대로 따르며 살아온 나의 의식이, 조금씩 틀을 깨야 하는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10명쯤 앉을 수 있는 커다란 공용 테이블 한가운데, 주황색 작업용 점퍼에 형광 안전벨트를 맨 남자가 커다란 샌드위치와 소다를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만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어 오른쪽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과 의자가 꽤 높아 키가 170cm가 넘는 나도 껑충 올라앉아야 했다.

잠시 후 점원이 나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라테 기계가 고장 나서 안 된단다.

설명해 준 점원은 백발의 백인 할머니였다. 나이는 족히 70대는 넘어 보였지만 목소리는 차분했고 설명은 또렷했다. 라테는 안 되고, 이건 되고, 저건 되고. 정중한 사과와 함께 옵션 정리까지 완벽했다. 밴쿠버 곳곳에서 이렇게 시니어들이 자연스럽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분이 다른 주문을 받으러 가자 신입으로 보이는 20대 인도 여직원이 다가왔다.

“주문 바꾸실 거예요?”살짝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커다란 눈과 새까만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부채처럼 펄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계 고장 나서 라테 안 된다던데요. 그러니까 바꿔야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 그렇지.”

그 반응에는 내가 영어를 잘 못할 거라 예상했다는 기색도 살짝 섞여 있었다. 가능한 건 레귤러 커피뿐이라 했으니, 캐네디아노 한 잔과 블루베리 머핀으로 주문을 바꿨다.


언어는, 정말 기세다.(흐뭇)

기세라면 자신 있으니까.


지금 내가 이곳에 앉아 커피와 머핀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하루 8시간씩 한국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어 여행자 기분은 나지 않지만,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언어와 풍경 속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묘하다.


8월인데도 가을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고, 시야가 탁 트이는 이곳. 캐나다 밴쿠버 코퀴툴람.

사방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옆 사람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는, 이곳의 국민 다방에 앉아 있다. 창가 아래 6인용 테이블에서는 백인 할아버지들이 아침부터 모여 껄껄 웃고 있고, 맞은편 2인용 테이블에서는 동양인 노부부가 말없이 차를 마신다. 그 옆에서는 인도 청년 셋이 또 다른 전투를 치르듯 떠든다. 나도 언젠가 현지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수다를 떨 날이 오겠지?


다문화, 다인종 국가 캐나다의 얼굴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는 기분이다.
이민자가 많은 이곳은 서로 네이티브가 아니기에 영어를 말할 때 눈치를 덜 보고, 서로 눈치껏 알아듣는다. 말이 조금 부족해도 괜찮은 이 느슨한 공기가 좋다.


이방인으로 살아가기엔, 캐나다는 확실히 따뜻한 나라로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커피 한 잔으로 이 도시 안에 조금 더 스며들고 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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