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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소정 Dec 29. 2023

15살, 일상 속에서 평온함을 터득했어요

시간의 가성비를 높이는 방법이란 이런 거죠

인생을 2배속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시간적인 여유를 얻을 수는 없다

가속의 시대, 생활 속도가 전반적으로 빨라지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120분짜리 영화를 5분짜리 영상으로 간추려 보고 “영화를 봤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늘었고요. 유명 맛집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대신 원격 줄 서기 서비스를 이용하여 시간을 절약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게다가 회사에서는 반차를 넘어서 반반차나 반반반차 같이 30분에서 1시간 단위로 휴가를 사용하는 경우도 생겨났고요.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절약한다고 해서 여유롭게 생활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은 짧아지고 집중력은 떨어졌어요. 절약한 시간에 남보다 2배 빨리 소비하고, 2배 더 많은 시간을 핸드폰 속에 갇혀 살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시간의 효율을 높이며 사는 걸까요? 시간의 가성비를 높인다고 해서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콘크리트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만 살다 보면 때때로 머리와 마음이 딱딱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해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고, 삶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죠. 마치 버스를 놓친 후에 "왜 저 버스를 타려고 했었지?"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처럼요. 저도 서울에서 25년을 살면서 건조한 삶에 익숙해진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강원도 영월로 내려온 후에도 저도 모르게 벽을 쌓고 살았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러다 스위스에서 사람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보면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학습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릴 적부터 일상 속에서 자연친화적인 경험을 하며 배운 것들이 평온한 삶을 만드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삶을 여유롭게 살아가는 방식도 대물림이 되더라고요.


스위스 사람들의 취미 중 하나는 등산과 자전거 타기예요. 스위스도 우리나라처럼 곳곳에 산이 많아 등산하기에 좋은 환경이거든요. 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3시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등산을 즐겨요. 저도 처음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농촌으로 홈스테이를 하러 온 다른 나라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6시간 30분이나 등산을 했어요. 스위스에서 처음 맛보는 등산이 아주 매콤했죠. 가이드가 처음 가보는 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 지도로 길을 찾다가 길을 잃었거든요. 덕분에 더운 여름날 허벅지가 축축해지는 만큼 땀을 흘리면서 땡볕을 걸어 다녔고요. 간신히 한 발씩 디딜 수밖에 없는 절벽 같은 곳에서는 오른쪽 아래로 큰 바위들이 가득한 계곡을 보며 아찔하게 산을 올라가기도 했어요. 등산을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난 후에는 "30분만 더 가면 숙소가 나온다"는 말을 믿지 못했어요. 다만 포기해도 저를 숙소까지 데려다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묵묵히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계속 걸었어요.


다행히도 등산을 하는 도중에는 방목된 동물들이나 농부 마켓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견뎌낼 수 있었어요. 산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요. 그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종소리가 들려오죠. 그렇게 계속 더 걷다 보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물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늘 밑에 늘어져 잠을 자고 있는 새끼 염소들이나, 사람이 다가와도 계속 풀을 뜯어먹고 있는 염소들을 만날 수 있죠.


그리고 가끔씩 산속에서 집을 볼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농장에서 직접 생산한 농식품을 판매하는 농부 마켓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젖소를 키우는 곳에는 우유나 아이스크림이 있고, 양이나 염소를 치우는 곳에는 치즈가 있어요. 스위스의 많은 농장들은 집 앞에 무인으로 운영하는 농부 마켓을 설치해 둬요. 산속에서 만날 수 있는 농부마켓에는 주로 치즈나 잼류뿐이지만 평지에 위치한 농부 마켓에서는 체리, 사과, 배, 복숭아, 양상추, 감자 등과 같은 다양한 농산물도 판매하고 있어요.


스위스에서 2번째로 홈스테이를 했던 곳의 호스트 마마는 농부 마켓에서 장을 보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호스트 마마의 부모님이 농부이셔서 지역 농산물을 구매해 농업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대형마트를 가지 않는다고 해요. 실제로 1달 동안 지내면서 호스트 마마랑 대형마트에 간 적이 없어요. 주로 동네에 위치한 로컬 푸드 식료품점이나 자전거를 타고 농부 마켓으로 가서 장을 봐요. 재밌게도 호스트 마마랑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신선한 경험들을 했어요. Bio Shop으로 세제를 사러 갔는데 호스트 마마는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사용하던 세제통과 유리병들을 꺼내는 거예요. 그리고 비어 있는 통의 무게를 재고 가게에서 판매하는 세제의 내용물을 그 통에 담으셨죠. 유리병은 저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기 있는 시리얼들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서 담아봐"라고요. 그렇게 내용물로 가득 찬 유리병을 다시 가방에 넣고, 그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니며 장을 보러 다녔어요.


한 번은 계란을 사러 마트에 갔는데, 호스트 마마가 또 가방에서 주섬주섬 뭘 꺼내는 거예요. 바로 계란판이었어요. 호스트 마마가 계란판을 저에게 건네면서 여기에 필요한 만큼 계란을 담으라고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계란판이 생기면 모아두었다가 찢어질 때까지 사용한다고 해요. 계란판 이외에도 라즈베리나 체리와 같은 작은 과일을 담은 종이 상자도 모아두었다가 다시 활용해요. 또 다른 일화로는 우연히 길을 가다가 체리를 판매하는 좌판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체리를 사 먹으려고 하는데, 호스트 마마가 다시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는 거예요. 이번에는 비닐봉지를 꺼내서 주인에게 건네는 거 있죠. 이전까지는 재활용이 분리수거를 올바르게 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회용품도 다시 사용하는 것이 진짜 재활용이라는 것을 호스트 마마한테서 배웠어요.


이렇게 친환경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대부분의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일상이에요. 호스트 마마가 저에게 친환경적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에요. 사실 그들도 부모로부터 같은 경험을 해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는 거예요.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가끔씩 호스트 마마가 15살 막내딸에게 학교를 갔다가 오는 길목에 있는 농부 마켓에서 감자이나 체리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켜요. 그러면 막내딸은 미리 챙겨간 장바구니에 채소나 과일을 담아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요. 막내딸이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숲 속과 밭들을 지나가야 하거든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자전거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녀요. 계절마다 바뀌는 숲 속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눈에 담아 가며 온몸으로 계절을 느끼면서요.


이렇게 자연과 가까이 살고 부모로부터 친환경적인 일상들을 겪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평온함을 터득해요. 사용한 일회용품을 재사용하는 일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대형마트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한꺼번에 사는 것보다 자전거를 타고 농부 마켓을 찾아가며 필요한 식자재를 구매하는 일은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시간의 가성비가 떨어지죠.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가성비를 높일 수는 있어요.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들을 통해 자기 만족감을 얻거나,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다니며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거든요. 더욱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덤이고요.


이렇게 자연과 가까이 살아가는 생활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 마음이 넘치지 않도록 마음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해요. 저도 스위스 농촌에서 2달 동안 시간을 보내며 한국에서 가득 싣고 간 걱정, 우울, 불안한 감정들을 모두 내려놓고 왔어요. 일상생활 속에서 배운 자연친화적인 습관들이 쌓여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만든다는 걸 느꼈거든요. 그래서 조금 시간을 들여 천천히 돌아가는 일이 오히려 시간의 가성비를 높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여유 시간을 늘리는 것보다는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내며 무엇을 얻었는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돈을 벌잖아요. 최소한 사람들이 절약한 시간만큼은 허덕이지 않고 여유롭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스위스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배우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하다면 아래 글을 읽어보세요! 자연과 함께하며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어요.

https://brunch.co.kr/@agricozy/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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