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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소정 Jan 19. 2024

자연인이 되다

흙먼지를 뒤집어써도 살만해요

깨끗하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더럽다고 못 사는 것도 아니다


95년생, 어릴 때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에는 흙이 깔려 있었어요. 흙 사이로 발이 푹푹 꺼지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얼음땡을 하며 놀았었죠.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운동장에서 만들어지는 흙먼지를 맞으며 생활했고요. 그때는 흙과 함께 하는 생활들이 익숙했어요. 하지만 제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수록 학교 운동장에 잔디밭이 깔리기 시작했어요. 어느샌가 놀이터에서 흙을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고요. 자주 놀러 가던 한강 공원과 어린이 대공원도 한두 곳 씩 정비 작업을 시작하더니 깔끔하게 정형화된 모습으로 변해갔어요. 놀이터에는 푹신푹신한 바닥과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등장했고요.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흙에는 기생충과 벌레들이 많아 아이들이 감염될 우려가 있어서 안전을 위해 놀이터와 학교에서 흙을 없애기로 결정했어요.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 푹신한 소재인 고무칩을 사용하게 되었고요. 학교 운동장에는 흙 대신 인조 잔디를 깔았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물질이 고무 매트와 인조잔디에서 발견되어 문제가 되고 있어요. 중금속, 화학물질, 환경호르몬, 발암물질 등이 아이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흙이 깔린 놀이터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흙과 모래는 여전히 아이들의 정서적 발달과 건강에 좋으니까요.


이러한 상황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간들이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연환경을 변화시키면서 발생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연을 유지하려는 노력보다는 인위적 것들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여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다시 환경을 회복시키려는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어요. 우리가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죠. 면역체계는 세균과 같은 미생물에 노출될수록 튼튼해지니까요. 그렇다면 몸에 축적되는 중금속과 같은 유해물질보다는 한 번 겪고 흘려보낼 수 있는 기생충이나 벌레들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출처 : 동작구 시설관리공단


제가 스위스 농촌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호스트 가족과 열흘 동안 산속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 여름휴가가 제 삶에서 가장 신선하면서도 끔찍한 휴가였어요. 매일 산속을 뛰어다니며 놀았지만, 10일 동안 몸을 씻을 수 없었거든요.


온도가 33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에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40년 된 노란 버스를 타고 호스트 가족과 함께 출발했어요.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6시간 동안의 대장정이 펼쳐졌죠. 꼬불거리는 산길을 최고속도 40km로 힘겹게 올라가는 노란 버스와는 달리 창 밖으로는 웅장한 산들이 예술작품처럼 펼쳐져 있었어요. 만년설이 녹아 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모습은 계곡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폭포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높이 솟아 있는 산봉우리 위로는 낮게 걸린 구름 사이로 찬란한 빛줄기가 내려와요. 마치 하늘에 있는 신이 자비를 베풀듯 따스함을 더해서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어떤 휴가를 보내게 될지 몰랐어요. 그저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대자연을 바라보며 인생 최고의 휴가가 될 거라는 설렘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거든요. 그런데 숙소에 도착하는 순간 눈앞이 막막해졌어요. 숙소가 스위스의 Flims-Laax라는 지역에 위치한 500년 된 집었거든요.


500년 된 숙소에 첫 발을 디딘 순간 머릿속으로 "아, 내가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스쳤어요. 영화에서만 보던 삐걱 거리는 나무집이었는데요. 청소를 해도 퀴퀴한 먼지 냄새가 집에 배어 있었고, 주방과 화장실을 제외한 나머지 곳들은 500년 전 모습 그대로였어요. 게다가 2층의 바닥에는 낡아서 구멍이 뚫려 있는 곳이 있어 아래에 사람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이 집에서 15명이 함께 생활하며 휴가를 보낼 예정이었는데, 화장실은 달랑 2개뿐이었고요. 침실에는 세균이 득실거릴 것 같은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어요. 심지어 샤워실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요.


그래도 첫날이라 저녁에 도착해서 제가 씻을 곳을 못 찾았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위생 상태가 심히 걱정되는 매트리스 위에서 밤을 보냈어요. 꿉꿉한 침낭을 매트리스 위에 깔고 먼지 가득한 스위스 군대 담요를 덮었답니다. 500년 된 집을 숙소로 대여해 주는 사람이나 대여하는 사람이나 참 대단하지 않나요?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씻을 곳을 찾아다녔어요. 숙소 근처에 샤워실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자연뿐이었어요. 그래서 호스트 마마에게 물어봤더니 여기서 지내는 동안 샤워를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죠. 매일 산속을 뛰어다니며 땀을 흘린 다음에 씻지 않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찝찝함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물어봤더니 "샤워를 하고 싶으면 집 앞에 있는 분수대에 퐁당하거나 이따가 가는 호수에서 수영을 하면 돼"라고 하시더라고요. 500년 된 숙소에서 물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거였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저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그들과 똑같이 생활할 자신은 없어서 매일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수건에 물을 적셔 씻으며 지냈어요.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니 막상 또 그렇게 살아지더라고요.


15명의 스위스 사람들과 한 집에서 씻지도 못하고 10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무던함을 배웠어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조금 지저분하게 지내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지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는 호수에서 수영을 한 후에 깨끗한 물로 씻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수영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유롭게 놀아요.


어느 날은 가족들과 호수 공원에 있는 공용 그릴을 이용해서 BBQ 파티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누구나 사용하는 그릴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저분했죠. 그래도 그릴에 고기, 옥수수, 파프리카 등을 구워 맛있게 먹었어요. 당연하게도 앞접시나 수저는 없었고요. 간신히 티슈 한 장을 깔고 손을 사용해서 먹었어요. 위생적이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추억이 되었어요.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아서 먹고 치우는 일이 간편했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위생에 대한 기준을 조금만 낮춘다면 하고 싶은 일들을 더 편하게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은 휴가를 함께 보내는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 행사에서 나눠준 타투 스티커를 붙이고 놀았던 적이 있어요. 아이들은 팔다리뿐만 아니라 얼굴 곳곳에도 붙였는데 저는 차마 타투 스티커를 피부에 붙이지 못하겠더라고요. 피부가 상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더 찝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은 타투 스티커를 붙인 채로 며칠 동안 지냈어. 물에 점점 지워져 스티커의 원래 모양은 사라져 지저분하게 흔적만 남았는데도 지우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그 위에 새로운 타투 스티커를 붙였어요.


생각해 보면 저도 어릴 때 껌에 들어있던 타투 스티커를 몸에 붙이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손등에 붙여두고 지워지는 게 아쉬워서 손을 씻을 때는 손바닥만 씻었던 적도 있었고요. 팔에 붙여두고 며칠 동안 유지되길 바라며 조심히 생활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타투 스티커를 붙이고 놀기보다는 지울 걱정이 앞서게 더라고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고 용기를 내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뒷수습이 걱정되어 주저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 같아요. 그래서 무언가를 쉽게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흙 놀이터가 다시 생기지 않는 이유도 아이들이 흙먼지를 싣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게 싫은 부모님들의 마음이 반영된 일일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위생적인 환경을 중요시해요. 저도 깨끗하고 정돈된 생활이 만족스럽고요. 하지만 청결한 삶이 사고의 유연함까지는 제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틀에 박힌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의 기준은 경계 없는 세상 속에서는 무한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위생적인 삶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 규범을 무시하는 행동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때로는  먼지와 미생물로 얼룩진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껴보는 경험이 삶의 유연성을 키워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가끔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즐거움을 느껴 볼 수도 있죠. 더러워진 몸과 옷은 깨끗이 씻으면 사라지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오래 남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스위스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여름휴가는 예상했던 대로 제 인생 최고의 휴가였던 것처럼요!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자란 아이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삶을 대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글을 읽어보세요:-)

https://brunch.co.kr/@agricozy/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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