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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람 Jul 05. 2024

1-3. 아름답지 않되 재주 있는 사람

작자미상의 <박씨전>

언젠가, 인터넷상에서 어떤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녀를 모두 포함하여 아주 못생긴 사람들은 사랑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글이었죠. 굉장히 극단적으로 쓴 글이었습니다만,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은 글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터넷의 여기저기에 널리 퍼진 글이 될 수 없었겠죠. 개인적으로 그 글을 보고 많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각기 다른 양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유전이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성형을 하지 않는다면 노력으로 생김새를 크게 바꿀 방법도 없죠. 그러니 만약 어떤 사람이 아름답지 않다면, 그건 사실 그 사람의 잘못이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로 인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다니……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인생에 불공평한 것이 어디 한둘인가요. 외모뿐만 아니라 경제력, 학벌 등을 비롯한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사람은 차별받기 마련입니다. 그걸 알지만,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걸 알긴 알지만, 사랑을 획득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오늘날, 아름다움은 성형과 같은 방법으로 개선할 수 있지요. 물론 성형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요소로 인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면, 사람이라면 그걸 바꾸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성형에 중독되지만 않는다면, 성형에도 순기능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성형수술도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로 가봅시다. 당시 아름답지 않았던 여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부모님이 주신 모습으로 살아갈 뿐인데, 여러 곱지 않은 시선들을 경험해야 했을 그들은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 서러운 마음을 담아 소설을 읽고 썼나 봅니다. <박씨전>에는 추녀가 나옵니다. 그것도 보통 추녀가 아니지요.      


그제야 신부의 생김새를 보니 얼굴 가운데 거칠고 더러운 때가 줄줄이 맺혀 마마 자국의 얽은 구멍에 가득하며, 눈은 달팽이 구멍 같고 코는 심산궁곡의 험한 바위 같고 이마는 너무 벗겨져 태상노군이라는 노자의 이마 같고 키는 팔 척이나 되는 키다리인 데다가, 팔은 늘어지고 한쪽 다리는 저는 듯해서 그 용모를 차마 바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홍길동전, 박씨전>, 푸른생각, 83p     


박 씨 부인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미인과는 정반대로 생겼습니다. 깨끗하고 흰 피부, 큰 눈, 반듯한 코와 이마, 지나칠 만큼 크지는 않은 키 등등이 우리가 원하는 미인의 조건이죠. 그러한 모습의 정반대로 생긴 박 씨 부인이 남편 이시백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물론 갖은 푸대접을 받습니다. 


이때 시백이 박씨의 추하고 보잘것없는 얼굴을 보고 한편으로는 미워도 하면서 얼굴을 대하지 않으니 남녀 노비들도 또한 같이 미워하였다. -같은 책, 84p


상공이 또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알고 있다면 오늘부터 부부간에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겠느냐?"

하는데, 시백이 명을 받고 없는 정이 있는 척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안방에 들어가보니, 아버지의 훈계는 헛일이고 박씨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보다 더 커지는 것이었다. -같은 책, 85p


그러자 시백은 얼굴빛을 엄하게 하고서,

"왜 요망한 박씨가 감히 나를 부르느냐?"

하며 꾸짖으므로 …(하략)… -같은 책, 101p


중매결혼으로 마음에도 없는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이시백도 안타까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집안의 대를 이을 이시백이 아내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니, 시어머니와 집안의 노비들도 하나같이 박 씨 부인을 미워합니다. 소설 속 이시백은 매우 총명하고 풍채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인만큼, 추한 아내가 더 보기 싫었던 걸까요? 자신의 오점처럼 느껴졌을까요? 아무리 훌륭한 남자도, 아름답지 않은 아내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걸까요?     


글쎄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실이 왜인지 사무치도록 뼈 아팠습니다. 그렇다면 박 씨 부인에게 몰입하는 제가 그렇게 못생긴 사람이냐고요? 그 대답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름다움을 점점 잃고, 결국에는 추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이를 역행하려 한다고 해도, 젊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는 없죠. 그건 자연의 엄정한 질서입니다. 만약 아름다움만이 여성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고 한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여자들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매여 한없이 서럽고 슬퍼질 것입니다.      


“저의 용모가 부족하여 부부간에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오니 이것은 모두 저의 죄이므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마는, 다만 제가 원하는 바는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님께 영화를 보시게 하고, 출세하여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며 나라를 충성으로 도와서, 폭군이던 하나라 걸왕에게 올바른 말을 하였다는 용방이나 은나라 충신 비간이 오랜 세월 길이 이름을 날림을 본받은 후, 다른 집안에서 아내를 맞아 자손을 보고 아무 탈 없이 오래오래 살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같은 책, 95p     


집안의 푸대접에 적응(?)하고 그것을 완전히 내면화한 박 씨의 반응도 안타깝습니다. 박 씨는 소설 속에서 모든 것을 외모가 부족한 자신의 탓으로 받아들이고 자숙하지요. 심지어 이시백이 다른 아내와 결혼해 무탈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박 씨 부인은 재주가 아주 많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수를 놓고, 앉은자리에서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고, 각종 도술도 부리고, 원금을 몇십 배로 불리는 재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자신을 향한 시백의 마음만은 도저히 바꿀 수가 없습니다. 시백은 아내를 아껴주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매양 들으면서도, 점점 더 차갑고 잔인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계속해서 그저 자숙하던 박 씨 부인은 어느 날,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절세미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제가 본 책과 판본에서 그 이후의 시백의 묘사는 잘 나와있지 않습니다. 시백과 박 씨가 동침을 하고 곧 태기가 있어 쌍둥이를 낳았다,라는 말만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박 씨 부인과 이시백의 이야기였던 소설의 제1부는 끝납니다. 제2부는 병자호란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아니, 뭔가 중요한 게 빠지지 않았습니까? 이시백이 그전까지 그토록 문전박대를 했는데 예뻐진 아내에게 그럴듯한 사과를 했다는 얘기조차 없습니다. 소설에 너무 몰입을 한 건지, 개인적으로는 좀 허탈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판본을 찾아보았습니다. <박씨전>의 다른 판본에서는 이시백이 제법 고생 아닌 고생을 합니다. 


‘아니 들어가진 못하리라’

하고 들어가려 하면, 자연 얼굴이 붉어지며 말이 꼬질꼬질, 가슴이 답답, 숨을 쉬지 못하고 겨우 한 발만 들여놓고 생각하다 얼풋 들어 앉더라. 박씨는 짐짓 그 눈치를 알고 속마음에 우습되, 외면 더욱 낯빛을 씩씩히 하고 몸을 요동(搖動)치 아니하고 앉았더라. 이때 시백이 방 안에 죽기를 무릅쓰고 앉았으나 입이 무거워 말을 할 수 없어, 다만 두 눈이 박씨 얼굴을 뚫을 듯하되, 박씨는 단정히 앉아 호발(毫髮)을 부동하더라. 시백이 오래 앉아 맥맥히 보고 묵묵히 앉았으니,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조금 덜하나 부끄러운 마음이 간절하여, 아무리 생각하여도 손 잡고 말하고 동침하기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겠더라.

그러구러 계명 후 시백이 마지 못하여 일어나, 외당에 나와 우상께 문안하니, 연고 모르고 의색이 만면하더라.

이튿날이 새매 시백이 피화당 근처를 배회하며, 방에는 감히 들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되

‘어서 해가 지면, 오늘밤에는 들어가 전일 박대하고 잘못한 말을 먼저 말하리라.’

하고 기다리더라. 황혼을 당하매, 시백이 의관을 정제하고 피화당에 가 방문을 열고 들어앉으니, 마음 죄이는 증은 어제보다 조금 나으나, 생각하던 말은 입을 열어 할 도리가 없는지라. 박씨는 더욱 단정히 앉아 위엄이 씩씩하니, 이른바 ‘지척(咫尺)이 천리’라. 설마 장부되어 처자에게 박대함이 있다 한들 그다지 말 못할 바가 아니로되, 3,4년 부부간 지낸 일이 참혹할 뿐, 박씨 또한 천지조화를 가졌으니 짐짓 시백으로 말을 붙이지 못하게 위엄을 베푸는 것이라. -<박씨전> 고대본,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2520


그렇게 괄시를 하더니, 절세미인이 된 부인을 대하니 왠지 부끄럽고, 고장이 나버린 이시백입니다. 며칠 간 말을 걸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냉대 받았던 분풀이를 한 박 씨 부인은 곧 화해의 제스처를 취합니다. 둘은 곧 잉꼬부부가 되지요.  


이 소설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주제는 뭘까요? 일반적으로 다들 알고 있는, 여자는 자고로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교훈일까요? 아니면 추녀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 글을 읽으며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목적일까요?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의 누군가가 지었을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시적으로 시백의 아버지이자 박 씨 부인의 시아버지인 상공의 말에 들어있습니다.      


“다만 용모만 보고 속에 품은 재주를 생각지 아니하느뇨?” -<홍길동전, 박씨전>, 푸른생각, 103p     


겉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모습으로 속단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현상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가 점점 더 쉬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못생긴 사람이 예쁜 사람보다 좀 더 못되고 어리석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대놓고 나이 든 사람을 배척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그대로 볼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인지하는 기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매체 대부분이 인쇄매체에서 시각매체로 변화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었던 변화입니다. 속은 제대로 알 수 없고 겉모습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글에서 아름답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거역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박 씨 부인의 아버지, 박 처사도 이시백을 딸의 남편감으로 고를 때 ‘아름다운 얼굴’을 고려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아름다움의 평가 대상이 된다는 거지요. 아름다움을 쫓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스를 수 없는 본성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려는 말은 다만.      


보이는 것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알려는’ 노력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자세히 알면 사랑하게 되어 있지요. 들꽃들과 나무들의 종류를 배운 사람은, 지나치는 들꽃과 나무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으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눈여겨보고, 다정하게 떠올리겠지요. 같은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다른 미덕들도 조금 더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못난 모습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지혜로운 모습, 정직한 모습, 결단력이 있는 모습, 꾸준한 끈기가 있는 모습,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모습,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등을 관심을 갖고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장점이 하나도 없는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장점을 알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조금 못난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려는 노력. 그것이 우리를 잔인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던 두 편과 달리, <박씨전>에서는 주로 미의 결핍에 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을 획득한 사람의 이야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살펴보겠습니다.      


-202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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