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유미주의자의 불행한 결말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사실 이번 주에 이 책을 처음 읽었습니다. 물론 그전에 이 책이 유미주의 소설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유미주의 소설에서 ‘미’는 당연히 ‘아름다울 미’ 자이고, ‘유’는 ‘오직 유’ 자인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까 오직 아름다움만이 가치가 있다는 거지요. 아름다움만을 위한 아름다움,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사조가 바로 유미주의입니다. 그래서 저는 옳다구나 하고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이번 챕터의 네 번째 작품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넣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얻은 청년의 이야기라는 것도 얼추 알고 있었기에, 책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과연 탁월한 선택이라고 몰래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러나 읽고 난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악하고 이기적인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에게 아무 공감도 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 자아’라고 말한 이 책의 저자 오스카 와일드에게는 더더욱 공감이 안 되었습니다. 이해를 할 수 없으니 아무런 해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이래선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을 해본 결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음’이 하나의 해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씁니다.
먼저 이 책의 줄거리를 가볍게 소개하겠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플롯은 나름 간단하다면 간단합니다.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어쩐 일인지 실제 자신 대신에 초상화 속의 자신이 나이를 먹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또한 그 초상화에는 그의 모든 죄악이나 악행 또한 반영됩니다. 점점 타락해 가는 도리언 그레이의 행태에 따라, 그의 초상화는 점점 더 추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바질 홀워드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앞에 거울을 가지고 섰다. 그렇게 서서 캔버스 위의 사악하고 늙어버린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윤이 나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그처럼 극명한 대조가 그의 쾌감을 자극하곤 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고, 점점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주름진 이마에 낙인을 찍거나 대단히 음란한 입가에 스멀거리는 흉측한 선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때로는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환희를 느꼈고, 때로는 죄악의 흔적이나 노화의 흔적 중 어느 쪽이 더 끔찍할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는 그림 속의 거칠고 부은 손 옆에 자신의 하얀 손을 놓으며 미소를 짓곤 했다. 그림 속의 보기 흉한 몸과 노쇠한 팔다리를 조롱하기도 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문예출판사, 전자책, 535p
하지만 실제의 그는 언제까지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매혹합니다. 겉보기론 점잖지만 뒤로는 타락한 이중생활을 하는 도리언 그레이에겐, 그의 참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그 초상화가 점점 더 눈에 거슬리지요. 어느 날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가 그려진 캔버스를 칼로 찢으려고 시도하지만, 그 칼에 스스로 찔리고 맙니다. 칼에 찔려 죽는 순간 그의 시체는 늙고 잔인하며 비열해 보이는 모습으로 변하고-그가 이미 그랬어야 했듯 말입니다-, 초상화는 젊고 아름다웠던 도리언 그레이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벽에 걸려있는 눈부신 초상화를 발견했다. 초상화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주인의 모습, 매우 아름다운 젊음과 미모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야회복 차림의 시체 하나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누워있었다. 주름투성이에 몹시 야위고 역겨운 몰골의 남자였다. 그들은 그 사람의 손에 끼인 반지들을 살펴보고서야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같은 책, 921p
책 속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유미주의 소설의 주인공답게 스스로 매우 아름답고, 또한 예술과 사물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앞서 말했듯 그에게 조금의 공감도, 연민도, 한 조각의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격렬한 거부감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제가 일부러 그에 대한 공감을 철저히 차단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그는 너무나 자유롭습니다. ‘지나치게’ 자유롭습니다. 그 자유는 그의 귀족이라는 지위와 부,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 매력적인 태도로 인해 획득한 권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유를 방종하게 써버리죠. 도리언 그레이는 매번 헨리 경의 잘못된 꼬드김에 넘어가 타락하지만, 그것조차 그의 자유에 의한 것입니다. 저는 때론 세상이 정해준 틀에 갇혀 괴로워할 때가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온갖 특권과 자유를 지닌 도리언 그레이의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방종’을 이해하기란 무리일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저는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도 그리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타인들의 규칙과 원칙과 도덕률, 그리고 저 자신의 초자아에 꽝꽝 묶여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도덕적인 사람이고 또한 나름대로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종종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전 어느 모로 보나 이 책의 바질 홀워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을 보든 교훈을 찾고, 사회의 법과 도덕에 순종하고, 거기서 벗어날 생각도 못하는 사람 말입니다.
"도리언, 기도하게, 기도해." 그가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에 배웠던 기도문이 어떻게 됐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소서.' 자, 같이 기도하세. 자네의 오만한 기도도 들어주셨잖아. 회개의 기도도 들어주실거야. …(하략)…" -같은 책, 도리언에 대한 바질의 권고, 656p
헨리 경이 낮추어 말하듯, 바질은 “재미없는” 사람이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에 더해, 저는 도리언 그레이가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충격적인 언동으로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파격을 안겨주었던 이 책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자유롭게 악행을 저지를 바에야, 차라리 조금 답답한 사고를 하는 저 자신이 좋습니다.
책 속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타락한 생활을 지속하여 추문에 휩싸이고, 다른 여러 사람들 또한 타락시켜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잔인한 말들을 내던짐으로써 사랑하는 여성을 자살하게 만들고, 영원히 젊음과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화가이자 친구 바질을 살해합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왜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오스카 와일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이 소설 속 도리언 그레이의 행태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작가로서 오스카 와일드는 뛰어난 균형감각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자유롭고 매혹적이며 사악한, 이 도리언 그레이가 불행한 결말을 맞게 만든 것입니다. 그의 이상적 자아의 반영이니, 사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가 영영 행복하길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리언 그레이가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교훈적’ 결말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그러한 문학적 장치마저 없었다면 이 소설은 그의 소망을 가득 담았으나 현실적 기반이 없는 붕 뜬 소설이 되었을 테고,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소설이 그러하겠으나, 이 소설의 결말은 신의 한 수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4년 뒤, 오스카 와일드는 마치 자신의 분신 도리언 그레이처럼, 불행한 일을 마주하게 됩니다. 동성애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지나치게 방종한 생활이, 사회로부터 극렬한 거부를 받을 것을 책을 쓸 때 미리 알았던 것일까요? 자신의 삶이 결코 해피엔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알았을까요? 알았든 알지 못했든, 오스카 와일드는 감옥에 들어간 뒤 완전한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출옥 후 다시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했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좀 흥미로웠던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초상화가 도리언 그레이의 노화뿐만 아니라 그의 죄악으로 인해 생겨난 추함도 짊어진다는 점입니다.
“죄라는 건 사람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야. 감출 수가 없지. 사람들은 이따금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악덕에 대해 말하곤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어떤 비열한 인간이 악행을 범했다면 입술 선에, 축 처진 눈꺼풀에, 심지어 손 모양에 저절로 나타나게 되지. …(중략)… 하지만 도리언, 자넨 순수하고 밝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어. 자네를 보고 있으면 자네에 대한 험악한 소문들을 조금도 믿을 수 없지.” -같은 책, 625p
이게 그 당시 19세기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인지, 저자 오스카 와일드의 독창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외모에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이러한 생각이 굉장히 교훈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유미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요?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의 외모에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을까요? 비열한 눈초리와, 잔인한 입술선 등에 말이죠. 이게 맞는 생각이라면, 반대로 결점 없이 아름다운 사람은 반드시 선하단 말인가요? 이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찬양해야 마땅한 것일 테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네요.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로는, 어쩌면 아름다움은 태생적으로 결정된 것이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흔이 넘어가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는, 사람의 죄와 품성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자신의 죄가 얼굴에 반영된다는 건, 선한 품성도 아마 반영된다는 뜻이겠지요. 인자한 눈매와 깊은 눈빛,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 입술 선, 단정한 태도 등은 설령 외모가 그리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듭니다.
어쨌든 저는 아직도, 도리언 그레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외모에 반영된다는 그의 주장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건 종종 지나치리만큼 자유로운 반항아였던 한 유미주의자가 남겨준 작은 유산이 아닐까요.
다음은 아름다움에 대한 마지막 작품입니다.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