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외쳐보는 '미투'(Me too)
퇴사한 여기자가 페이스북에 '미투(Me too)' 글을 올렸다. 짧은 기자 생활 동안 겪은 '사내/외 성추행' 을 총망라해 기록했다. "경찰서 2진 기자실(수습 기자는 입사 후 3~6개월 동안 경찰서 내 기자실에서 숙식해야 한다) 대신 우리집에서 자라"고 강제로 택시에 태웠던 남자 선배, "내가 지금 5성급 호텔에 있으니 여기와서 씻으라"던 취재원. 기껏해야 20대 후반이었을 그녀가 겪은 성추행 피해담을 읽는데 심장이 다 쿵쾅거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그녀가 쓴 A4 1.5매 분량의 글 중에 내 눈을 가장 오래 사로잡은 문장은 따로 있었다. "퇴사의 직접 요인과는 무관합니다." 그녀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그녀가 '미투'에 동참하기 전 '퇴사'와 분명히 선을 그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나는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스물여섯부터 서른 하나까지. 나 역시 기자로 일했다. 지근거리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들은 아주 '깔끔'했고, 외삼촌처럼 나를 잘 챙겨줬다. 주중 최소 이틀은 회식을 하고, 남기자로만 구성된 선후배와 함께 1박 2일 MT-모텔이 아니라 멤(M)버십 트(T)레이닝-도 갔으나 내게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역시 내가 인복 하나는 타고났다고 의기양양했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퇴사 후 전업주부가 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입사 후 처음 갔던 출장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해외에서 국위 선양하고 있는 우리나라 건설사를 취재하는 게 첫 출장의 미션이었다. 떠나기 전 국내 건설사의 해외 지사에서 일하는 한 40대 중간관리자를 소개받았고 현지에서 그를 만났다. 건설사가 수주한 프로젝트를 설명해줄 분이었다. 취재가 끝나니 밖이 캄캄했다. 호텔까지 나를 데려다준 그가 내 방까지 들어와 밍기적거리며 이것저것 설명했다. (샤워기는 여기 있고, 커피포트는 여기 있고 같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그리고선 호텔 바에서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첫 출장의 부담 때문에 전날 잠을 설쳤던 터라 너무 피곤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내 방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바에 가기 싫으면 호텔방에서라도 한잔 하자고 집요하게 굴었다. 거의 싸울 듯한 태세의 파워 정색 끝에 그를 호텔방에서 내보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첫 출장도 매우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마치 오물 가득한 하수구에서 수영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그가 훽 돌변해 내게 완력을 썼다면 나는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습기자인 내게 친절했던 모 경찰서 수사관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경찰서) 밖에서 보자며 회사 근처로 왔다. 스페인 음식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곁들인 반주를 했다.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타는데 그가 따라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깍지를 꼈다. 오래 만난 남자 친구가 있다고 다섯 번은 넘게 말했고, 그는 나보다 못해도 열 살은 많았다. "이게 도대체 뭐지? 우정의 표시인가?" 내게 일어난 일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서지현 검사의 표현대로 '환각'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정은 아닌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 일'은 없었다. 그러나 더러운 기분은 한 동안 지속됐다. 내 '업무용 미소'가 너무 진짜 같았나. 내가 기자처럼 보이지 않았나. 취재원과 가까워질수록 양질의 뉴스를 얻는 직업. 인정받기 위해 최대한 취재원에게 다가가면서도 '너무 가까운 건 아닌가' 늘 안절부절못했다.
손깍지 수난사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술에 취한 한 대기업 회장이 갑자기 내게 손깍지를 껴 옆에 있던 수행원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회사 상사도 술에 취해 아프도록 손깍지를 꼈다. 이제 나는 '성추행'의 기준을 수정했다. '손깍지' 정도는 성추행이 아니다.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져야 성추행인 거다. 그렇게 '성추행'의 범위를 하나하나 좁혀 나갔다. "와이프 배란일이라 집에 가야 한다","여자한테는 오징어 냄새가 난다"는 남자 선배의 말도 성희롱으로 안쳤다. '밀크'라는 언니(실제론 동생이겠지)가 치어리더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러주는 술집에서 회식을 한 것도, 노래방 룸 안에 화장실이 있는, 속셈이 뻔한 노래방에서 매번 2차가 진행된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걸 문제 삼기 시작하면 자꾸만 '별 일'이 생긴다. 그럼 나만 괴로워진다. 그렇게 맘대로 성희롱, 성추행 범주를 좁혀놓고 "내게는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는데도 자꾸만 내 입에선 이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사회라는 게, 원래 이렇게 더러운 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돈 벌어야 하나?"
며칠 전 팟캐스트에서 '낙타의 허리를 부러뜨린 깃털'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미 한계에 가까운 짐을 지고 있던 낙타에게 '깃털' 하나를 더 얹어줬더니 낙타의 등뼈가 부러져버렸다. 낙타를 주저앉힌 것은 깃털인가, 아니면 오래 짊어지고 있던 '버든'(Burden)인가. 과연 '직접'과 '간접' 사이에 분명한 경계는 있는가.
일하는 여자가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성희롱과 성추행은 때로는 '깃털'이고 때로는 '버든'이다. 이미 턱 끝까지 차오른 스트레스에 성희롱 한 마디가 얹혀져 여자를 주저앉힐 수도 있고, 수십 번의 성희롱과 성추행이 차곡차곡 쌓여 가벼운 깃털 하나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왜 퇴사했냐"는 숱한 질문에 지금껏 나는 단 한 번도 사회에서 보고, 듣고, 겪은 '더러운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건 직접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게는 '별 일'이 없었으니까. 더한 일을 당하고도 꿋꿋이 일하는 여자들이 내 주변만 봐도 수두룩하니까. 가벼운 성추행과 성희롱을 퇴사 사유 중 하나로 꼽는 일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남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지쳤을 뿐"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게 '별 일'이었다. 무시하려고 애썼으나 마음속엔 수치심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사회에 대한 믿음은 자꾸 무너졌다. 종국엔 "이 더러운 사회와 영원히 이별하고 싶다"는 환멸까지 일었다. 그 짙은 환멸이 집으로 가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더러운 일들'과 퇴사는 무관하지 않다. 버든인지 깃털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영향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 글에 등장한 '가해자'는 모두 익명이다. 내 용기는 여기까지다. 오래 고민했다. 혹시나 훗날 이 글이 내 발목을 잡을까 봐. 솔직히 지금도 겁난다. 그래도 말해야겠다 싶다. 서지현 검사가 스스로를 태워가며 밝힌 '미투'의 불씨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는데 내 글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씨만 꺼트리지 않는다면 하나의 불씨로 수십 개의 초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나에게서 누군가 불씨를 이어받고, 그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가 불씨를 이어받는다면 이 사회가 이전보다 조금은 더 밝아질 것이라 믿는다. 덧붙여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후배에게 도 진심으로 응원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