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연애시절 긴 통화는 적잖이 싸움을 불러왔다. 음성 통화의 한계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음색이나 표정변화, 시선 및 사소한 행동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며 말을 주고받는다. 통화는 비언어적 시그널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차단되어 있다. 따라서 부족한 정보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메워간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하고 별것 아닌 일들이 별것이 되어버리기 부지기수다.
연애를 통해 오랜 기간 알아온 사이도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나는데 난생처음 보는 학부모와 전화 상담은 여간 조심스런 게 아니다.
그래서일까 코로나 시국에서 학부모 상담은 격식을 긴 갖춘 인사말 나누기일 뿐이었다. 자칫 삐끗했다가는 민원만 발생할 것이 충분히 예견되었기에 그러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학부모 상담 기간이 다가온다. 전화 상담을 원하는 가정이라면 난 또다시 긴 인사말만 앵무새처럼 읊조릴 것이다. 섣불리 말하기에는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면대면 상담이라 해도 아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뿐이지 내가 무엇을 먼저 권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한 달 만에 누군가를 온전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눈에 밟히는 몇몇 아이들은 이미 전화를 통해 상담을 진행하긴 했다.
"제가 아이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나요?"
난 딱 이 정도만 물었을 뿐이다. 결코 순탄치 않은 역경을 짧은 몇 분에 함축하여 알려왔고 아이를 대하는데 참고하고 있다.
그 기간 아내와 나 또한 아들의 학부모가 된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교사지만 조심스럽다. 자칫 예민하거나 까칠한 학부모로 비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수십 명을 대하는 교사에게 갖가지 요구사항은 사실 적잖은 부담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교사는 아이들의 담임이지 부모들의 담임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자랑 늘어놓는 학부모 정보를 그대로 믿었다가 실망했던 일이 너무 많았기에 절대 그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서울대를 차석으로 졸업시킨 학부모는 면담할 때마다 아이가 항상 부족하다 했던 말이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상담을 하는 일도 상담을 받는 일도 만만치 않다. 별 일 없이 다가올 상담을 흘려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