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한 아이가 늦을 것이란다.
정말 매번 늦었다.
1교시까지는 기다려보고 2교시 시작할 때도 등교하지 않으면 보호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통화해 보려 전화해도 받지를 않아 문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11시 언저리에 오던 시간이 그래도 이제는 1교시 이내 교실에 도착한다. 등교시간이 늦는 이유는 간단했다. 스마트폰 게임 중독으로 새벽까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때문이다. 해마다 등장하는 일들이기에 놀랍거나 낯설지도 않다.
보호자에게 어찌하라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봐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말을 해봐야 그건 듣기 싫은 잔소리기에 지켜볼 뿐이다.
아이는 아이 나름의 상처가 있다.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조심스럽기도 하다. 아이에게 할지 말지를 묻고 거부하는 것은 더 요구하지 않는다. 공부에 대해서 말이다.
가르치는 것이 내 일이지 아이의 행동이나 생각, 학습 의지를 바꾸는 것은 권한 밖의 사안이다. 그건 타인이 행할 수는 있는 일 또한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거리는 아이와 신경전은 날카로워지기 마련이고 그 분위기는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피한다.
하려는 아이들을 독려하고 그런 아이들의 성과를 인정하여 더 큰 발전으로 이끄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안 하려는 아이들이나 말썽을 부리는 녀석들에게 노력 대비 효과도 미미한 노력은 이제 기울이지 않는다. 가르침에 대한 교사로서의 의무는 충실히 이행하되 배움의 몫은 아이의 책임이란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아이를 바꾸겠다고 오지랖을 부려봐야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올 뿐임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지각이지만 머리가 커질수록 점점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이다. 머지않아 등교 자체를 거부할 테고 게임을 위한 행동들이 이 아이의 미래에 상당한 장애물이 될 것도 훤히 보인다. 하지만,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해서도 안 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아이나 아이 보호자에게 하고픈 말은 참아야 하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