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클리닉 상담일지
"아!!!!"
부엌에서 뜨거운 냄비에 덴 내가 소리를 질렀다.
'하.. 이 냄비 손잡이는 안 뜨거운 거 아니었나? '
아 화상, 내가 진짜 싫어하는 고통 중 하나다.
근데 우리 남편은 미동도 없다.
내가 부엌에서 소리를 질러도 우리 남편은 폰만 본다.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왜 그래? 뭐야? 괜찮아?
많고 많은 말 중에 단 한마디도 나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냥 진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핸드폰만 본다.
참.. 연애할 때는 내가 고개만 두리번거려도
누나 이거 찾아요? 하던 남자친구였는데..
지금은 내가 다쳐서 소리를 질러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
결혼은 이런 건가? 신혼이 좋다는 건 나중에 그런 다정함이 없어서 인 건가?
혼자 조용히 얼음찜질을 하고 밴드를 찾아 붙인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그는 전혀 나의 상황을 모른다.
그냥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연애할 때 그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던, 아니 오히려 눈치 좀 그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사람을 잘 살피던 그는 지금 내가 3번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여보~ 여보! 아 여보!!!!!"
꼭 언성이 높아져야 대답을 한다. 그마저도 쳐다는 보지 않는다.
"여보 나 봐봐. 똑바로 들어. 우리 이번주말에 10시까지 합정 가야 해 알았지?
그럼 집에서 9시에는 출발해야 돼. 알았지? 늦으면 안 된단 말이야!!"
"아 웅 알았어"
대충 대답한 그는 주말이 오기까지 최소 3번은 더 물어볼 것이다.
이번 주말에 어디 간다고? 몇 시까지 간다고? 몇 시에 출발한다고?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다.
일할 때 연락이 되지 않던 우리 남편은, 연애할 때는 정말 일할 때만 연락이 안 됐다.
퇴근하고 나면 자기 전까지 꼬박꼬박 연락하고 잘 자 인사하고 사랑스러운 이모티콘을 보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연락이 안 된다. 내 카톡을 읽씹 하는 것도 일상이다.
나는 매번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 조용한 카톡방에 다시 한번 말 걸어본다.
그리고 어쩔 때는 그마저도 읽씹 당해 씁쓸하게 세 번째 카톡을 보낸 적도 더러 있었다.
하루는 주말에 나 혼자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집에서 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설거지, 빨래 어느 하나 좀 했으면 좋겠지만
해달라고 말하면 자기는 왜 이렇게 쉬는 날에도 바쁘냐고 피곤해죽겠다고 죽는소리만 한참하고
일은 안 할게 뻔하기 때문에 이제는 말도 안 한다.
그래.. 푹 쉬어라 푹 쉬어
머리가 끝날 때쯤 카톡을 보냈다
"뭐 해?"
"그냥 있어"
오 웬일로 답장이 빨리 왔다, 기분이 좋았다.
"나 30분 뒤에 머리 끝나는데 데리러 올래? 저녁 먹으러 가자~ 여기 집 앞 미용실이야."
"구래 나갈게"
앗싸 신난다. 남편하고 데이트는 언제나 신난다.
머리가 끝나고 전화를 걸었는데, 배경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여보 어디야..?"
"웅 나 가는 중!"
"어디로 가는데..?"
"나 성수!"
우리 집은 마포다.
"왜 성수로 가..."
"여보 성수에 있는 거 아냐???"
"내가 집 앞이라고 했잖아... 늘 가던 미용실이잖아... 여보도 저번주에 여기서 머리 했잖아...."
"헐? 나 왜 성수로 봤지?????"
진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든다.
집에서 나올 때 집 앞 미용실로 간다고 말한 것도 기억 못 하고
카톡으로 장소 말한 것도 집중도 못하고
내가 어딨 을지 유추도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서 행동하는 사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진짜 대체 왜
우리 가정의 경조사 같은 중요한 약속 말고도 이렇게 일상생활에 대한 얘기까지
우리 남편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주의 있게 듣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가 대체 어디까지 챙겨줘야 하는 거야?
네가 초등학생이야?
연애할 때 그렇게 다정하고 내가 먹고 싶다고 말한 건 꼭꼭 기억해 뒀다가
다음 데이트 때 맛집 찾아오고, 내 행동하나하나에 반응해 주던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 간 거냐고
이런 게 결혼인 거냐고
나는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고
이걸로 화도 못 내고 그냥 또 넘어가야 하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