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9살, 6살.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 남동생은 어린이집을 다니니,
아빠의 양손은 당연히 동생들의 몫이었다.
대구 우방타워랜드, 임시개장일 아니면 첫 개장일이었으리라. 얼마나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매표소부터 놀이기구가 있는 메인 광장까지 인파 속에 떠밀리듯 천천히 걸어나가야 했다. 나는 처음엔 동생 손을 잡고 있었는데, 4명이 나란히 걸어갈 수 없게 되면서 어느 순간 아빠의 머리 꼭지를 보며 뒤따라 걷게 됐다.
느렸다. 모두가 잰 걸음으로 앞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잠시 멈춰 구경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우방타워랜드는 미국 EDAW사가 기초설계한 놀이공원이었고, 당시 대구에선 쉽게 볼 수 없었던 유럽풍 컨셉으로 꾸며져 모든 것이 볼거리였다.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조경이었다.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조경사는 입장객 인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천자만홍 색색의 꽃이 심겨진 미니 화분을 이리저리 배치하며 하나의 커다란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 한참이나 넋을 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의 머리 꼭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나 앞으로 간거지? 나는 사람들을 밀치며 한참 앞으로 가봤지만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조경사가 있는 화단쪽으로 되돌아왔다. 눈물과 공포가 범벅된 얼굴로 조경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그는 나의 SOS 신호를 무시하고 화분 배열에 열중해 버리는 것이었다.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라고 배웠다. 하지만 단 5분도 참고 서있을 수 없었다. 공포는 나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매표소로 걸어내려갔다. 놀이공원 직원에게 말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올라오는 길을 홀로 내려가고 있는데, 울며 서 있는 또 다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 주변에도 어른이 없었다. 나와 같은 상황. 나 또한 어렸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매표소 직원의 도움으로 놀이공원 내 마련된 미아보호소에 들어갔다. 아기 놀이방처럼 꾸며진 그곳에서 동화책을 꺼내 읽었다. 아까 나처럼 길 잃은 그 아이도 여기로 오려나?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아빠는 나를 찾으려고 왔던 길을 되돌아왔었단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자 아빠는 동생들을 주차장으로 데려가 차 안에 앉혀놓은 후, 나를 찾아 우방타워랜드 곳곳을 뛰어다녔다. 동생들은 봉고차 안에서 나와 아빠를 2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얼마나 나가서 놀고 싶었을까. 얼마나 지루했을까. 당시 우방타워랜드는 미아보호소를 두 곳 운영 중이었는데, 하필 아빠가 처음 방문한 곳은 내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빠는 어쩌면 나를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을 느끼며 12만 평에 달하는 그 넓은 놀이공원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윽고 미아보호소 문이 세차게 열렸다.
아빠였다.
여덟아홉명 아이들 사이에서 단박에 나를 알아본 아빠는,
동화 속 왕자가 공주에게 장미꽃을 줄 때 한쪽 무릎을 꿇는 그 자세로 앉아 두 팔을 벌렸다.
“아빠!”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품으로 달려가 안기는데 아빠의 옆얼굴에는 눈물줄기가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아빠도, 눈물을 흘리는 아빠도,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아빠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집에 가자!” 했다.
동생들은 잠시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나를 찾아서 너무 기쁘다며 다시는 나를 볼 수 없게 될까봐 무서웠다고 했다. 초등 고학년에 미아보호소 신세를 진 것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해 명절 '가장 웃긴 이야기'로 등극했다. 그 후로도 이따금 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면 미아보호소 사건도 회자됐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날, 왕자 무릎을 한 아빠 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