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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12. 2024

조용필로 시작해 잔나비로 끝났다


지역 축제에서 신인가수와 밴드가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실력 있는 가수들이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불렀다. 옆에서 가사를 감상하며 듣던 남편이 눈물을 흘렸다. 마흔 넘은 남편이 우는 것을 보니 나도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노래를 들으며 마음속에 무언가 차오르고 있었나 보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사실 노랫말의 결론에 대해서 나는 괴리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로 해석한 채 노래를 감상하는 것이 그 순간의 최선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씁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모르면 몰랐지 알면서도 그럴 수는 없노라고 나는 생각했다. 마치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순수한 어린이의 시각에서는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러나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어른은 그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른은 인간의 속성을 알고 있고, 어떤 삶의 흔적만 보아도 과거와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편견일 가능성도 매우 크지만. 그 편견을 벗는 것보다 입고 사는 게 차라리 내 삶을 지키는 데 도움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 기대어, 가능성보다는 경험을, 꿈보다는 현실을 좇는 데 익숙한 평범한 어른으로서는.


그러나 노래를 감상하면서는 목청껏 따라 불렀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사랑하겠네, 사랑할 수밖에 없겠네... 하는 마음이 마지막쯤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러고서 뒷줄쯤 앉아있던 나는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지역축제답게 연령대가 참 다양했다. 아주 어린 아기들과 어린이들, 젊은 부모부터 중년의 부부, 늙수그레한 노인들까지. 노래가 끝나고 나서는 다양한 외모와 표정을 가진 그들이 하나하나의 캐릭터로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가끔 글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참 사랑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이야기 속 캐릭터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간극장이라는 영상 매체에서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것은 실제 인물의 삶을 담아낸 다큐였다. 차이는 시선에 있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며 실제 인물의 특성을 이해한 카메라감독과 작가의 시선이 그들을 캐릭터화시킨 것이다.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특정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험담이 아니고서야 그건 좋은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본 그 사람과 네가 본 그 사람의 특성이 일치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어떤 캐릭터가 된 것이다. 그 특성에 기대어 그는 밉지 않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각자에게 소화된 캐릭터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 시선을 입힌 채 소개된다. 사람들은 이것의 결과를 평판이라고 부르지만 그 과정에서 그를 캐릭터화시키는, 사랑의 눈으로 보아주는 시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의 시선이 좋은 평판까지는 만들어주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를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인간극장을 연출한 PD와 작가처럼, 그들의 특성을 가만히 관찰해서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적어도 한쪽 면만 보고 시선을 거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랬던 때가 있기는 했다. 사람들이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했던 때가. 그가 입체적인 캐릭터로 탄생하기까지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 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내게 남은 건 타버린 재처럼 볼품없지만, 사랑할 대상은 여전히 있다. 너무도 많다. 그래서 이 비좁은 품에도 누군가는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 또다시 찾아올 누군갈 위해서 나는 여백을 남겨두어야겠다.


여백을 가늠하기 위해 글을 쓴다.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라 쓰다 보면 까만 글자로 빼곡해지더라도, 안 쓰고는 못 배길테니 또 숨겨둔 종이를 꺼내고 꺼내겠지. 어디에라도 쓰겠지. 빌려서라도 쓰겠지. 신문지 위에라도 쓸 것이다. 그렇게 다 써버린 마음은 결국 불쏘시개처럼 볼품없이 태워진대도 사랑은 남을 것이다. 광활한 여백에 점을 찍는 것부터 시작되었던 그 사랑이.


지역 축제에 애완닭이 나타나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주인이 품에 꼭 안고 사랑스럽게 쓰다듬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캐릭터가 아주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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