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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09. 2024

파도가 아닌 파도타기에 휩쓸려가는 인생

침묵이라는 무기


묵비권이란 피고인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것 같은 진술은 거부하는 행위이다. 독일의 코칭 전문가 코르넬리아 토프는 침묵은 법정에서조차 사용될 정도로 유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침묵에도 규칙이 있으니,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침묵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입을 다물 적절한 시점'을 찾아내라고 한다.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침묵은 유익하지만,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의 소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침묵 또한 유익하다. 바로 정적의 시간이다.


토프의 말마따나 정적에 휩싸이면 불쾌하고 당황스러운 일들, 귀찮고 성가신 일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치려 하고, 불쾌한 생각들을 쫓아버리려 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교차로 읽고 있는 파스칼의 팡세를 떠올렸다. (그리고 토프도 글의 말미에 파스칼의 을 인용했다. 이럴 때 느껴지는 기쁨과 쾌감이란!) 파스칼은 <오락>에 관하여 이런 글을 썼다.


죽음과 비참, 무지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그런 유의 일들은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중략) 여흥을 빼앗긴 주인공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그저 불행한 처지에 관한 생각을 벗어버리고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한바탕의 동요, 바로 그것이다.


요즘 난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이럴 때 <나는 솔로>나 <라디오스타>를 봤는데 이제는 <새롭게 하소서>나 <김창옥쇼>를 본다. 김창옥쇼는 재미와 감동과 때때로 교훈까지 있다. 특히 용기 내서 고민 사연을 보낸 관객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다. 이런 게 리얼리티가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 진행 중인, 실재하는 삶의 무게가 화면 속에 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측면의 현실을 인식하고 싶을 땐 다큐를 본다. 사회적 문제를 바라본다. 내가 따라갈 수도, 반할 수도 없 삶의 흐름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래도 내가 다큐를 보며 내 안에 숙제 같은 질문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은 정적에 휩싸일 때 도망가지 않으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사실 다큐를 보며 질문을 쌓지 않더라도 내 안에서 떠오르는 문제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죽음과 비참, 무지로 인한 고통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새롭게 하소서>와 <김창옥쇼>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는 또 다른 종류의 여흥일 뿐이다. 벗어나는 순간 상반된 현실로 인해 내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줄 예능보다는, 간접적으로 나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종류에 가까운 것이다. 완전히 나의 문제가 아니면서도 곧 나의 문제이기도 한.


이래서 솔로몬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다(전도서 7:4)고 했던가. 이러고 나서 보면, 각종 티브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도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 삶을 보며 추구하려 했던 배경들마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그라운드가 다를 뿐, 우리 인생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나보다 돈이 많은 저 사람은 내가 가진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고, 나도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러다 놓치고 있는 것들을 보았을 때, 이게 아니다 싶을 때마저 잠시도 멈춰 설 수 없다면 떠밀려 죽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것도 내 인생이 부딪힐 진짜 파도가 아닌 수많은 인생들이 만들어놓은 파도타기 따위에.


병든 사회 속에서, 그릇된 가르침과 오염된 가치관으로 심어놓은 믿음과 실제의 삶이 일치되지 않는 토대 위에서 우리는 너무나 힘겹게 뿌리내리고 있다. 눈물겹게 살아가고 있다. 죽음과 비참, 무지로 인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이것에 대한 파스칼의 결론에 대해서는  팡세(고전의 숲 두란노 머스트북 출판) 130-132페이지를 읽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내가 경험한 세상을 말해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경험한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내 인생에서 겪었 결핍을 피하게 해 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결핍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자. 그리고 무엇을 심을 것인가. 다만 거짓과 허상을 심지는 않기로 결단해 본다. 희망을 말하기 전에 절망스러운 현실을 알게 하고, 부를 추구하기 전에 가난의 현장을 보게 하고,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하기 전에 죽음의 때를 생각하게 하는 엄마가 되기로 다짐해 본다.



* 파란색으로 표기한 부분은 코르넬리아 토프의 <침묵이라는 무기>의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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