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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08. 2024

삼키고 뱉어낸 존재들

자신을 견딜 수 있는 자


"엄마!"


아들이 밥그릇을 깨뜨렸다. 얼어붙은 아들 대신 딸이 나를 불렀다. 아들은 평소에도 야물지 못해서 놓치거나 흘리는 일이 잦았. 그러려니 하다가도 아들이 커갈수록 실수에 대한 나의 인내심은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나는 자가진단으로 성인 ADHD를 의심한 적이 있다. 그런 의 아들이니까, 나를 닮아 그런 거라며 이해하려 노력 중이지만 그만큼 예민해지는 게 사실이다. 이후에 우유를 흘리지 않고 잘 따라서 칭찬해 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유잔을 넘어뜨린 아들이다. 그전에 자기 밥그릇을 깨뜨렸다. 와중에 밥은 다 먹어서 다행이었다.


"움직이지 마!"


산산조각 난 밥그릇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첫째 아이가 아직 바닥을 기어 다니던 시절, 젖병을 씻으려다 식탁 위에 놓인 유리젖병을 깨고 말았다. 산산조각 난 바람에 눈에 보이는 크고 작은 조각들은 치우고 치워계속 나왔다. 아주 작은 파편까지 제거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바닥을 기어 다닐 딸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철렁했다. 끝없이 나오는 유리파편을 훔쳐대며 울었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이지, 하면서.




나의 엄마는 걱정이 많지만 차분한 사람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게 흔들리다가도,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체념이 빨랐다. 무슨 일을 크게 벌이지 않았고, 사사로운 일들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가 떨어뜨려서 바닥에 양념국물이 낭자했을 때, 델몬트 병에 담긴 보리차를 꺼내다가 깨뜨렸을 때에도 엄마는 나를 꾸짖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닮은, 정확히는 내가 닮은 아빠에게는 참지 못했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두가 점잖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아빠를 보며 알게 되었다. 그는 자주 헤맸고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때가 많았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탓에 그의 어설픈 행동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나의 엄마는 평소에는 순한 사람이었으나 갑자기 불끈하고 성을 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순하다기보다는 상당한 고집과 인내심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심기가 불편하면 묻는 말엔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차올라서 폭발하는 순간 냄비뚜껑이 날아가기도 했으니. 얼마나 차올랐는지, 그 한계점과 폭발하는 순간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녀의 상반된 인내로 지켜졌던 가짜 평화를 기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순한(조용한) 그녀가 오죽하면 그럴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삼키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암덩어리가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녀가 삼킨 수많은 것들 중에는 나와 아빠도 있었으리라. 나와 아빠의 어이없는 실수에 속이 뒤집어지는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실수라고 불리는 틈 사이로 드러난 무지함과 무심함에 더욱 실망하고 질렸으리라. 나는 그 속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묵묵히 삼켜졌고, 아빠는 그렇지 않음으로 자주 내뱉어졌다. 엄마가 그를 퉤, 하고 뱉어낼 땐 원망과 한까지도 뱉어내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들이 팽개쳐진 채 한 데 뒤엉켜서 지저분하게 나뒹굴었다. 한 때는 여자의 사랑을 뒤집어쓰고 있었을 한 남자가, 이제는 증오와 멸시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서 나는 떨었다. 그와 너무도 닮아있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저런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예언적 두려움이었다.


한동안 나는 아빠를 미워했다. 아빠는 허당(땅바닥이 움푹 파여서 다니다가 빠지기 쉬운 곳)이면서도 스스로를 메울 의지가 없어, 다른 사람까지 덫에 걸리게 만드는 블랙홀 같다고 생각했다. 곁에 있는 사람을 필연적으로 수고롭게 만드는 사람. 그러나 타인의 수고로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 그러니까 염치도 눈치도 없는 사람. 어린 내가 바라본 아빠의 모습이었다. 나는 능력은 없어도 염치와 눈치는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사회적으로 자발적 겸손함을 장착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동안 아빠를 닮은 나를 미워했다.




나의 미숙함을 조용히 삼키던 엄마의 사랑을 생각한다. 동시에 내팽개쳐진 채 초라했던 아빠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는 나를 반절만 사랑했지만, 아들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결국, 아들이 닮은 나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길 바랄 수 없고, 아들이 나를 사랑하길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움푹 파인 구멍이 있어요. 공사 중입니다. 여기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로 사람들을 사랑하며, 또한 그들의 배려에 감사하며, 이러한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어낸 나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다른 사람의 용납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감사함을 절실하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누구나 실수할 수는 있어. 하지만 저지른 실수에 대해 스스로 수습하려는 책임감이 필요해. 그런데 어떤 실수는 스스로 바로잡기 어려운 것도 있어. 그럴 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만약 너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을 함께 감당해 주거나, 너를 책망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거든 반드시 고마워해야 한단다. 그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사랑은 허다한 실수를 덮거든.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너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해. 자신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란다. 너를 용납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네가 스스로를 미워하지 는다면, 너는 실수를 통해 매일 사랑을 배울 수 있어. 그러니 기억하렴. 너의 실수보다 큰 사랑을. 사랑보다 큰 것은 없다는 사실을."




*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 자신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다(김종원,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중에서)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상기 출처의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 사진 출처: Pixabay, Michael H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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