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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10. 2024

책을 읽는 엄마에게 내가 바랐던 건

책을 덮고 일어서는 일


내가 안 하려고 노력하는 행위들이 몇 개 있다. 그중 책과 관련된 것 하나는 바로 '책을 읽다가 자는 것'이다. 그게 어때서? 그게 나빠서가 아니라, 책을 읽다가 자던 한 사람의 삶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는 거의 매일 책을 읽다가 주무셨다. 책을 항상 누워서 읽으셨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책을 누워서 읽는 것도, 읽다가 자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의아하면서도 답답했던 건 따로 있었다.


"엄마, 자? 불 끈다?"


분명히 눈을 감고 코까지 골았는데도, 엄마는 내 물음에 다시 눈을 뜨고 책을 읽었다. 이럴 땐 텔레비전을 독차지하고 잘락 말락 하던 아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응, 안 자."


잔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졸리지만 책을 읽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나는 궁금했다. 엄마는 책이 정말 재미있어서 그럴까? 어떤 부분이 재미있을까? 책을 통해서 엄마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을까?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말이 없었다. 말수가 적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 안에 있는 생각이나 느낌, 깨달은 가치나 정서들을 내게 좀체 나눠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 안에 담긴 것들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법이니까.


그래도 책은 좋은 거니까, 엄마에게도 뭔가 좋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는 책만 읽지 않고 모든 종이 쪼가리들에 쓰여있는 글자를 읽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나 교회 주보까지 집에 가지고 와서 읽었다. 거기에는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겐 취향이랄 게 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형편이었다. 엄마가 누군가에게서 얻어 온 동화책 시리즈의 다음 권 내용이 너무 읽고 싶었는데, 구할 길이 없어 포기해야 했던 아쉬움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책과 글이 귀한 시절에 자랐던 엄마는 오죽했을까. 그래서 온갖 글자를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나 싶었다.




그런데 대체 그 글자들이 엄마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나. 좋은 글들은 과연 엄마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까. 우울한 삶의 순간을 버티게 한 힘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싶다가도, 글자들 앞에 무력하게 누워있던 엄마의 몸과 자꾸만 감기던 눈꺼풀을 떠올리면 나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 수많은 글자들 속에서, 어느 한 문장이라도 엄마의 눈을 반짝 빛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어느 한 구절이라도 엄마의 삶을 힘 있게 일으켜 세울 순 없었을까. 수불석권. 엄마는 늘 손에 글자가 쓰인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우리의 언어는 달라지지 않았다.


책 앞에서 희미해져 가던 엄마의 모습이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다. 차라리 책을 덮고, 불을 끄고 자고, 다음 날 씩씩하게 일어나고, 힘 있게 살고, 다시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이었다면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 독서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역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는 있었다. 돈이 없어도 독서를 통해 풍성한 삶의 양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글자를 읽는 정적인 활동에서도 역동적인 삶을 이뤄내는 은 충분히 가능했다. 단,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읽느냐에 따라서.


나는 책을 통해 쉼과 힘을 얻고자 다. 독서를 통한 삶의 변화를 기대한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웬만하면 앉아서, 서서, 책상에서 읽는다. 옆에는 노트를 두고 와닿는 문장들을 필사한다. 그렇게 마음에 힘을 얻고 실천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허리가 자주 아픈 탓에 누워서 읽을 때도 있지만 책을 읽다가 졸리면 나는 그냥 덮고 잔다. 책은 맑은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안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담겼을지라도 흐릿한 마음으로는 결코 내 마음에 담아낼 수 없다.


요즘은 콘텐츠가 대량 생산되는 시대이므로  정제된 글도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콘텐츠를 '소비한다'고도 표현하지만, 글을 읽는 행위만큼은 소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다.  생각에 글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하는 것이다. 내면이 성장하도록 돕는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양가 없는 글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 좋은 글도 얼마든지 소화하지 않고 소비할 수 있다. 반대로 영양가 없어 보이는 글도 꼭꼭 씹어 먹으면 단 맛이 나기도 한다. 단 맛이든 쓴 맛이든, 소화하지 않고 소비한 글은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통렬하게 묻는다. 나의 독서는 나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나의 독서는 나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런데 왜 바꾸지 않는가? 왜 늘 같은 방식으로 읽고 있는가? 왜 늘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기억하자, 오직 약한 인간만이 고통보다 안락함을 추구한다. (중략)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죽은 독서는 단순히 잉크가 묻은 자리를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김종원,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중에서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책이 재미있니? 그런데 왜 재미있어? 에이미의 행동을 보니 큭큭 웃음이 나는구나. 그런 것도 재미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책을 읽을 때는 마음에 공감이 되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단다. 마음이 건드려지는 것, 그런 재미도 있지. 그리고 때로는 책을 통해 내가 몰랐던 것을 알아갈 수도 있어. '아, 이래서 이런 거구나!' 하는 지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그러면 나의 시야가 넓어지는 거야.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이 커지는 거지. 읽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커지는 거야. 엄마도 책을 통해 재미를 얻고, 위로를 얻고,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는단다. 이렇게 얻은 것으로 엄마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어. 너희에게도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너희도 책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엄마에게 나눠줄래? 우리 그렇게 우리의 세계를 넓혀가보자."


독서를 통한 변화를 추구하지만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내면은 단단해질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진정한 내면의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순리이다. 단단하게 일궈낸 내면에서 꺼내는 나의 말과 태도가, 아이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하겠다. 세대가 지나서 얻게 되는 열매 또한 값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엄마는 내게 씨앗 하나를 심어준 셈이다. 움트지 못한 싹이 이제야 꿈틀대고 있다.


획일화된 세상 속에서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일까 저것일까 방황하는 아이에게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 말해줄 수 있다면, 책을 통해 세운 몇 가지 기준에서 내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아이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는 엄마에게 바랐던 것이자, 내가 책을 읽는 이유다.


나는 책에서 좋은 문장을 찾아내고 필사한다. 지금도 필사노트를 아이가 보는 공간에 놔두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아이에게 낭독해 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그 문장을 왜 적어두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해 줄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기억하겠지. 엄마의 반짝이던 눈빛을. 엄마의 눈을 반짝이게 했던 한 문장의 힘을. 그 힘으로 씩씩하게 살아낸 엄마의 삶을. 아름답게 팽창하던 우리의 세계를.



*사진 출처: Pixabay, Angel Hernand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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