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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17. 2024

명절에 친정에 가지 않았다

핑계인 줄 알면서도


명절에 시댁에만 머물다 왔다. 내게 친정은 가고 싶지 않은 곳, 특히나 아이들을 데리고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자식 된 도리를 지켜야 마땅하나 갈수록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다. K-장녀로서 나름 효를 다하려던 언니마저 작년을 기점으로 나가떨어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외갓집 식구들에게 연락을 삼가던 엄마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엄마에 대한 연재글을 쓰고 있어서일까, 그나마 한 번씩 연락하는 나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전한다. 나의 안부든, 언니의 안부든 엄마에게는 반드시 '잘 지내고 있다'로 전한다. 잘 지내고 있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엄마에겐 기댈 것과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행히 고모네 부부와 부모님은 때마다 잘 어울리신다. 고모는 이십여 년 전 이혼했현재는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번에도 두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을 보니 사촌 오빠들도 명절에 고모네를 찾지 않는 모양이다. 고모를 비롯한 친가 사람들은 어릴 적 명절 때 유일하게 만나친척들이었으나, 그 속에서 내가 마음 둘 어른은 한 명도 없었다. 이십 대 중반을 앞두고 마주했던 외삼촌들 앞에서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렇게 든든한 기둥 같은 어른들이 왜 내 곁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서 지금은 어색함만 감도는, 친척 언니와 동생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나는 아쉽고도 억울했다. 내가 필요할 때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을 어른을 늦게 만난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미운 오리새끼가 된 것 같은 억울함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운 오리새끼의 새끼로서 느끼는 기분이었다. 같은 조카의 자격을 얻고도 그들이 일구어온 가족이라는 문화에 나는 낄 수 없는 존재였다. 중요한 것은 자격이 아니라 문화였다. 우리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왔다.


"우리는 왜 외갓집에 안 가?"


어릴 적에는 단순히 세뱃돈을 많이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친구들은 명절에 친가도 가고 외갓집도 간다는데, 우리는 매번 친가만 가니 이상했다. 세뱃돈을 얼마 받았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에 비해 내가 받은 액수는 턱없이 적었다. 우리가 받는 용돈이나 세뱃돈은 부모님의 주머니에서 나간 만큼만 돌아오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보다도 많은 액수였다. 그걸 알고 나서는 세뱃돈을 염두하고 묻진 않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홀로 '수금하듯' 외갓집에 다녀온 이후로는 더욱 묻지 않았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어른들의 세뱃돈이라면, 나의 엄마에겐 1/10의 금액을 조카들에게 쥐어줄 능력도 없었다.


나의 엄마는 외갓집 식구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이었다. 여덟 명의 형제 중 유일한 여자여서 외할머니의 역할을 돕느라 희생한 부분이 있었다. 삼촌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우리가 자라는 동안 어려울 때마다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었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라고 여겨서인지 엄마는 결혼 후 외갓집에 자주 가질 않았다. 나중에는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 이유 중에는 많은 형제들만큼이나 많아진 조카들에게 돈을 챙겨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공부를 곧잘 하던 나만 덜렁 셋째 삼촌 가족에 맡겨 보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였어서 세뱃돈을 꽤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엄마는 그것으로 내 교복을 사고 이것저것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을 것이다. 그 염치없던 오랜만의 방문을 끝으로 명절에 외갓집에 가는 일은 다시없었다.


"엄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다. 엄마는 정말 본인의 엄마를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저 질문을 할 때마다 외할머니가 안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할머니가 미운 이유를 댔다. 외할머니는 사치가 심하다는 둥, 철이 없다는 둥 내 앞에서 자기 엄마 흉을 봤다. 외삼촌들이 돈을 얼마씩 모아서 여행을 보내주고, 무스탕을 사주고 했는데 그게 며느리들에게는 또 얼마나 부담이 되겠느냐면서. 나 같으면 안 가고 안 입고 말지 뭣하러 자식들을 괴롭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체로 이런 소식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던 외삼촌네 부부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난히 그런 시댁 문화를 부담스러워하던 외숙모와, 자식으로서 보탤 것 없는 엄마의 마음이 자주 통했다.


그러나 왜 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유일한 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고생시켜 놓고선 지금은 호강하는 엄마가 미우면서도, 그 호강에 동참할 수 없음으로 괴롭기도 했을 그 마음을 생각해 본다. 또한 엄마에게 자식으로서 '잘 살고 있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서 쉬이 나서지 못했을 마음도. 자신이 선택했으면서도 외갓집 식구들이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양가감정도. 모든 것이 섞일 수가 없고 분리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처지의 존재. 그 존재는 그저 알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가족의 품을,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을.


나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외갓집 식구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오래전 혼인이 성사된 것을 보면 그 시절 면장의 딸을 내어줄 만큼 뭔가 있었기도 한 모양인데, 그것이 알고 보니 그저 허우대에 불과했다면 실망할 법도 하다. 그리고 그 허우대가 나이 들어도 지켜지는 반면, 엄마의 외모는 비교도 안되게 망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친척 결혼식 때나 만났던 외갓집 식구들 앞에서 아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외삼촌들은 꼭 한 마디씩 거들었다. 우리 동생이, 우리 누나가 얼마나 예뻤는지 아느냐고. 내 친구들 중에 개를 시켜달라거나 눈독 들이는 사람이 많았다고. 엄마의 화려한 과거를 들먹일 때마다 그녀의 현재 모습과 삼촌들의 표정이 오버랩되었다. 민망함과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자아냈. 대놓고 안으로 굽어대는 팔을 보면서도 아빠가 안쓰럽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이렇게 된 것에 어느 정도는 아빠의 책임이 있다는 무언의 책망이었다. 엄마의 외모엔 우울과 가난의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가 외갓집에 가지 않은 이유와 내가 엄마집에 가지 않는 이유는 사뭇 달라 보인다. 엄마는 성공한 자식들 사이에서 호강받고 잘 사는 외할머니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고, 나는 엄마를 내 삶에 드러내기가 힘들다. 엄마를 마주 보고 있노라면 엄마의 얼굴에 드러난 가난의 그림자가 너무도 짙어서 무서워진다. 나도 다시 저 가난의 기운에 삼켜지고 말 것 같다는, 엄마의 잦은 한숨에 내가 선 땅이 꺼져버리고 말 것 같다는 두려움이 인다. 엄마가 선 땅을 좀 더 단단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보고, 일구는 데 도움을 보태고자 해도 엄마는 꿈쩍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라날 적에도 그녀는 자신만의 성을 구축해서 살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누군가의 도움은 그저 물질적인 것만 받을 의지가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만의 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그것으로는 삶을 구성하는 게 아니고 연명하는 것에 가깝다. 그 외의 것들에 대한 도움은 그녀에게 도움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인지 감당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지만, 돈으로 그 성을 통째로 옮겨주지 않는 이상 그들은 움직일 의지가 없다. 그러나 내겐 돈으로 그들을 살 능력이 없다. 때마다 보내는 적은 용돈으로는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똑같이 초라한 생활을 며칠 정도 든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아무런 노후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그들의 삶을 나 역시 대비하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맏며느리였던 그녀가 시아버지를 천국으로 떠나보냈음에 감사했을 때처럼, 나도 부모님을 천국으로 이사시키고 나서야 안심할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냄새나고 불안한 그들의 터전보다 흙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들에게 더 평화로울 것이라고 여긴다면 천인공노할 불효심일까. 그들이 아니라 나의 평화를 바라는 같잖은 이기심이 들통나겠지.


언젠가 내가 평생 무거워하던 그들을 하늘로 보내고 나면, 출장이나 친구 결혼식을 핑계 대고서 고향에 갈 진짜 이유가 없어지고 나면, 나 역시도 그들을 진심으로 그리워할지 모른다. 살아계실 때 잘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을 치고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차선이 되어버린다. 명절도 아무 날도 아닌 날, 출장을 핑계 대고 얼굴 한번 잠깐 보고 오기로 한다. 명절엔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출장 땐 일정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리를 두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서 단단히 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언젠가는 나의 딸이 내게 물을 것이다. 엄마는 왜 외갓집에 가지 않느냐고.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그때를 대비해 미리 답변을 해본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엄마는 항상 보고 싶지. 엄마는 그런 존재니까. 그러나 엄마라는 존재에게 기대하는 것을 외할머니가 모두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꼭 외갓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엄마에겐 외할머니가 엄마로 충분했을 때가 있었어. 그때의 엄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질 때가 있단다.


그래도 할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을 수 있으니까, 엄마 얼굴 보여주러 갈 거야. 엄마가 자주 못 가서 할머니가 쓸쓸할 수도 있겠지만 이해해 주실 거야. 지금 엄마에겐 엄마가 필요한 너희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엄마가 혼자 가면 너희들도 외로울 테니, 같이 가면 좋겠다. 할머니가 엄마를 낳아줬으니 그것만으로도 할머니께 감사한 일이야.


그리고 자주 보면 좋은 사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도 있어. 가족이라도 그럴 수 있어. 가족 안에는 부모의 의무와 자녀의 의무라는 게 있어. 의무는 짐을 지는 것과 같아. 그러니 가족은 짐을 나눠지는 존재란다. 그런데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어느 한쪽이 너무 무겁게 되어버릴 수도 있는 거야. 우리 서로를 너무 무겁게 하지 말자. 우리 서로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 평생 그렇게 살자. 자주 보자, 오래오래."

  

<그리고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엄마, 얼굴 자주 보여주지 못하는 딸이라서 미안해. 나는 요새 방치된 채 자라다 나를 다시 키워가고 있어. 나를 돌보고 나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많이 버겁기도 해. 엄마를 돌봐야 할 시기가 언젠가 다가오기도 하겠지. 그래서 사실 두렵기도 해. 평생 우리는 서로를 걱정하며 살겠지. 그래도 나는 엄마에게 말하고 싶어. 늘 이야기하듯이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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