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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03. 2024

자는 아이 눈썹은 왜 뽑아가지고

엄마는 못 말려


"아얏!"


못 말리는 사랑이었다. 엄마는 꼭 내가 잘 때만 노려서 내 속눈썹을 뽑았다. 대체 왜 자는 아이의 눈썹을 뽑아가는지. 느닷없는 통증과 함께 잠에서 깬 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성공했다는 의미로 헤헤 웃으며 자기 논리를 펼치는 엄마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이렇게 하면 속눈썹이 길어진대."


말도 안 되는 엄마의 논리였지만 덕분인지 정말 내 속눈썹은 길다. 뷰러만 살짝 해도 마스카라를 한 것처럼 풍성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잠든 사자의 코털, 아니 잠든 아이의 눈썹털 그것도 속눈썹털을 뽑다니 너무했다! 모든 종류의 털이 그렇듯 무력으로 뽑을 땐 통증이 수반되는 법. 연약한 아이의 연약한 살에 돋아나있는 털을,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눈꺼풀에 붙어있는 털을 그토록 가차 없이 뽑아낸 사람은 우리 엄마밖에 없으리라.


엄마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었다. 못 말린다는 말은 말 그대로다. 호소하고 짜증 내고 화내고 울어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그 절망감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 소통이 되지 않는단 소리다. 다소 가벼운 일화로 예를 들었지만 나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사람.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꼭 자고 있을 때 뽑지 않아도 되었다. 흔들리는 유치를 뽑고 새 치아가 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듯 충분히 설명해 줘도 될 일이었다. 그런 과정도 없이 자고 있을 때 냅다 뽑아버리는 것은 그릇된 사랑에서 비롯된 비겁한 어른의 행동이었다.


나는 길고 풍성한 나의 속눈썹을 볼 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은 딱히 들지 않는다. 그건 내가 무방비 상태에서 느껴야 했던 놀람과 고통과 짜증과 절망을 견딘 대가일 뿐이었다. 속눈썹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의 감정과 의견이 수용되기를 바랐다는 말이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엄마 생각에 이렇게 하면 너에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런데 싫어? 그렇구나. 알겠어, 네가 싫다면 안 할게. 그러면 나중에 한 번 생각해 봐. 한 번 해보려고?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구나. 엄마 말을 믿어보기로 했구나. 너에게 좋을 거라고 한 엄마 말을 믿어줘서 고마워. 이건 너에게 틀림없이 좋을 거야. 엄마가 너에게 보낸 좋은 마음을 네가 좋은 마음으로 받았으니, 반드시 좋은 열매가 있을 거야."


이렇게 해서 내 아이가 더 예뻤으면, 더 잘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야 좋다. 그러나 아이의 감정과 의견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왜 좋은지 아이는 당장 알지 못한다. 그러니 충분히 설명해주어야 한다. 설령 말도 안 되는 논리일지라도 그것을 설명해 주는 과정에서 아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엄마가 지금 나를 존중해 주고 받아들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 기분이 좋고 엄마가 좋으면 그저 따르는 것이 순수한 아이들의 특성이다. 오죽하면 모르는 사람이 친절하게만 대해도 따라가겠는가. 그런 아이들이기에 부모들이 그토록 불안해하는 것이다. 아이의 순수한 욕구를 존중하되, 순수한 아이에게 순수한 진심을 전해주는 엄마이고 싶다.



*사진 출처: Pixabay, Marta Carra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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