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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12. 2024

브런치라는 바닥에도 전시하는 게 있다

이 바닥은 이런 바닥이다


학창 시절에 편지를 참 많이도 다. 펜팔이라는 이름의 교환노트부터 수업시간에 휘갈긴 쪽지까지. 문구점에 가서 예쁜 편지지가 보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사다 놓았다. 엽서는 쓰다 보면 항상 칸이 모자랐다. 편지지는 한 세트에 여러 장이 들어있으니 막힘이 없었다. 그렇게 두툼해진 그 시절의 편지봉투는 지금의 돈봉투만큼이나 내 마음을 충만 했다. 전해줄 마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으로 마음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사실 대상이 누군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 다. 초등학생 때 교내에서 '교장선생님께 편지 쓰기 대회'를 개최했는데, 나를 모르고 나도 잘 모르는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석 장이나 써냈다. 최고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분량에 담긴 정성이 갸륵해서였을 것이다. 무슨 말을 썼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학교를 대표하는 교장선생님의 노고를 생각하며 썼던 것 같다.


그런데 편지를 써 본 지가 언제인가. 지인들은 SNS로 카톡 프로필로 삶의 일부를 드러낸다. 직접 소식을 주고받지 않아도 잘 지내고 있는 듯 보인다. 잘 지내고 있는데 부러 끼어들 명분이 없다. 나도 그 수준으로 '잘' 지내야만 대화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걸까. 이제는 그들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엔 주기적으로 안부를 묻기도 했는데, 그 연락을 이어가기엔 각자가 걷고 있는 시간의 결이 다름을 느낀다. 내가 지난날 그 시간을 걸어봤다고 해도 그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길은 나의 길이고, 이 길의 끝에는 내가 있다. 함께 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좁아지다가 각자의 평행선을 걷는다. 서로를 둘러싼 세계가 다르더라도, 그 세계를 해석하는 시선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브런치라는 교차로를 건넌다. 이곳에서도 그저 나의 길을 갈 뿐이라고, 나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차로에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나는 마음을 나눈다. 걷다 보니 나와 발걸음을 같이 하는 이들이 생기고, 다른 길목에서 헤어지기도 한다. 또다시 나타난 교차로 앞에서 조우하기도 한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새로운 발걸음을 만나기도 한다. 방황하는 발걸음에겐 조심스레 신호를 알린다. 우선 여기로 와요, 저도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지만 다음 신호가 켜질 때까진 같이 있을까요. 저는 저기로 한 번 건너보려고요.


브런치에서는 글로써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내밀한 상처들과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음을 풀어놓는다. 풀어놓은 마음을 만져본다. 매만지고 쓰다듬다가 나의 마음도 내어본다.  마음은 댓글로 전시된다.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잠시 망설이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써서 전시해 놓기로 한다. 인스타처럼 나의 자랑거리를 전시하는 게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글을 읽는 사람을 향한 사랑의 마음, 좋은 마음이라면 전시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이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기꺼이 이정표가 되기로 한다. 나도 다른 사람의 댓글을 보고 이 길의 분위기를 어림짐작했던 날있었으니. 이 길에서는 마음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나도 한 번 흘려보내볼까. 이제는 어느 길보다도 자주 다니는 길, 내 마음도 자주 내어본다. 마치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가장 먼저 써둔 이야기가 있다. 서랍 속 임시저장된 문장들을 하나하나 꺼내 쓰면서도 끝까지 남겨둔 이야기. 가장 쓰고 싶었던 이야기면서 동시에 가장 쓰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발행하지 못하는 밑바닥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브런치에 발행된 글들에서 들의 바닥을 본다. 바닥을 공유하는 마음은 어떨까. 그들도 진짜 바닥은 남겨두고 있을까. 그렇더라도 여기까지는 가능하다고 여기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교차로를 지나는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이 바닥에 자신의 바닥을 풀어놓는 그 마음은. 적어도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지 않을까. 나의 약함으로 되려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믿음 말이다.


나의 하늘이 아니라, 나의 바닥을 보여줘라. 그래도 괜찮다.


가장 마음에 가까운 글들을 내면서도 나는 아직 바닥을 보여줄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나의 바닥을 보는 것, 나의 바닥에 가 닿는 것을 스스로 원치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슬며시 다른 사람들의 바닥을 들여다본다. 이 이야기들을 글로 만나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때로는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글로만 꺼내놓을 수 있는 비밀한 내용들, 글로만 표현될 수 있는 세밀한 언어들이다. 바닥은 말 그대로 바닥이다. 누구의 바닥이 더 밑바닥인가 경쟁함이 아닌, 각자가 선 그곳에서 느끼는 가장 밑바닥의 마음이다. 밑바닥에서 바라보는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생각과 마음이다.


꺼내놓은 글들에 댓글로 마음을 전한다. 고르고 고른 언어를 전시해 본다. 먼저는 글쓴이에게 보내는 마음이요, 다음은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보내는 마음이다. 본문을 읽지 않은 어떤 이들에게는 전시용 댓글에 불과하겠지만, 같은 곳에 멈춰 선 이들에게 내가 먼저 나눌 수 있는 마음이요 안부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이런 가치를 발견했는데 당신은 어때요? 뭔가 좋은 것이 있나 둘러보며 눈으로 손으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내가 발견한 좋은 것을 들려주는 마음이다. 꼭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렇게 속삭이고 싶은 것이다.


이곳은 마음을 내놓는 곳입니다.
바닥을 보여줄 수도 있는 곳입니다.
이 바닥은 이런 바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또 지나는 이곳에는 마음이 머문다. 마음은 마음을 잡는다. 마음은 마음의 마음을 잡고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계속 쓸 수 있다.


<바닥>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 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 파란색으로 표기한 부분은 김종원 작가의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문장을 인용하였습니다.


*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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