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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08. 2024

뒤늦게 알게 된 그녀의 병명

애달픈 기록(1)


주말을 맞아 열 시간이 넘게 잤나 보다. 한 번씩 깨고, 다시 몽롱하게 잠이 들곤 했지만 간밤에 내가 꿈속에서 울었다는 기억이 났다. 슬픔이 뜨겁게 솟구쳐서 옆으로 누운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던 느낌이 생생했다. 그 시점은 바로 꿈속에서 외할머니에게 따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왜 우리 엄마를 식모로 보냈어요? 그 많은 식구를 낳아놓고 왜 엄마에게 떠맡겼느냐고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요?"




엄마는 여덟 명의 자식 유일한 여자라는 이유로 꽃다운 나이에 식모생활을 하며 식구들에게 착취당했고, 외삼촌들에게 뒤늦게 받은 그 값을 아빠와 우리에게 또 착취당했다. 중학교 1학년, 타지에서 시작된 유학생활을 기점으로 엄마는 이십 대 초반까지도 가족들의 밥을 짓는 식모생활을 했다. 엄마보다 유일한 윗형제인 큰외삼촌과 밑에 줄줄이 딸린 동생들 세 명까지 끼고 살았으니 형제의 절반을 엄마에게 맡긴 셈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중간중간 친척 어른들을 붙여주려는 노력은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내 어머니가 떠안게 된 현실을 모를 리 없었다.


외할머니는 자그마한 몸으로 여덟 명의 아이를, 그것도 일곱 명의 아들을 낳은 이유로 무려 이십 년간 밥 해주고 빨래해 주는 식모를 두고 살았다고 한다. 고작 중학생이었던 엄마가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안에도 가정부를 부린 셈이다. 그러면서 반찬 하나 해다 준 적이 없었다고 하니, 내가 시집간 이후로 임신을 하든 출산을 하든 나 몰라라 했던 엄마의 무심함에 절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당시 면장이나 되었던 외할아버지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생활비로 보내셨다고 한다. 거둘 자식은 많고 철부지 아내는 대접받길 원하니 외할아버지도 사는 게 힘들었을 거라고 엄마는 말을 보탰다. 살림을 몇 년 해본 주부라면 아껴 쓰는 습관이나 깎아달라는 능청이라도 갖췄을 테지만, 예민한 여중생이었던 엄마에겐 막막하고 고단한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시절 학교 다니랴 장 보랴 밥 하랴 설거지하랴, 엄마 말마따나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다.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도 엄마는 학업이 우수했다던데, 동상에 걸려가며 밥 짓는 동안 때를 놓쳐버렸다. 애초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엄마의 학업에 관심이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여덟 명의 형제 중 유일한 여자였던 엄마에게 기대했던 것은 그저 중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의 뒷바라지였을지도. 엄마가 제풀에 학업의 뜻을 접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엄마가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 기강이야 큰외삼촌이 단단히 잡았다고 해도 밥 짓고 생활하는 것이 어디 보통일인가. 그리고 한창 많이 먹는 시기의 소년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자취방이라고 눈치 없는 오빠친구들까지 놀러 와서 밥을 축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큰형에겐 눈치 보느라 못했던 행동들도 착한 누나 앞에선 과감했을 것이다. 엄부자모, 엄마는 그들의 엄마도 아니면서 수컷들의 입김 속에 중간역할까지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몸고생과 마음고생, 이 모든 것을 엄마에게 떠넘기다니. 어찌 보면 돈 받고 몸고생만 하는 식모생활보다도 못한 아닌가.


그때부터 생활비를 받아쓰는 것에 익숙했던 엄마는 아껴 쓰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생활비를 엄격히 통제하고 운영하는 건 엄마의 성격과 질 않았다. 그건 내일 먹어야 하니 먹지 말라고 한소리 하기보단 자기가 굶고 동생을 먹이는 걸 선택했던 사람이다. 내가 자랄 적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순응적이고 물러터진 성격이라서, 주면 주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겠거니 하고 외할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평생 그녀를 주무르며 살았나 보다. 언젠가 바보 같은 엄마는 자기가 무능한 아빠를 만나 살기 위해 외할아버지로부터 모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바보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나의 학창 시절, 아빠는 변변한 직장이 없었고 구직을 가장한 무직 상태로 있던 때가 더 많았다. 건설사업을 하던 외삼촌이 꽂아준 현장감독 자리를 몇 개월 간 해 먹는 동안에도 잡음이 많았다. 이후 멀끔한 외모 덕분인지 조금 더 안정된 경비직에 몸담았을 때도 번 돈의 전부를 엄마에게 일정하게 갖다 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평생을 그랬노라며 울분을 토했다. 자기가 어떻게 아끼며, 얼마나 거지같이 사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못 믿어준다고 억울함을 토해냈다. 과연 못 믿어서였을까. 오히려 너무 믿어서였을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는 인간들만이 덮어놓고 사는 법이다. 거지같이 살든 외삼촌들에게 손 벌리든 어떻게든 가정이 굴러가는 것을 경험한 아빠는, 그렇게 평생 엄마가 전전긍긍하며 살거나 외갓집에 아쉬운 소리를 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외갓집 식구들에게는 자주 신세를 졌고 갚을 길은 없어 보였지만, 외삼촌들도 받을 생각 없이 베푸는 것을 보니 젊은 날 엄마의 희생에 먼저 빚진 대가로 여기는 듯했다. 그 꽃다운 희생의 대가를 엄마는 결국 자신에게 쓰지 못했다. 어릴 적엔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젊을 적엔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식구들을 위해 구걸하듯 받아 쓰며 살았다. 평생을 남에게 받아 쓰는 엄마의 인생이 너무도 아쉽다. 그녀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받아 쓰는' 인생을 살지 않는 것에 만족해할 뿐이다. 나 역시 월급쟁이로서 '받아 쓰는' 삶에 지나지 않지만, 그녀가 일정치 못한 가계수입원에 의존하며 받아 썼던 불안정한 모습과는 같지 않다.


내가 어릴 적엔 일하는 엄마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전업주부였지만 받아 쓰는 것도 나름이다. 받아 쓴다는 말에 얼마를 받아서 쓰는지, 금액은 명시되지 않아 더 억울할 노릇이다. 그마저도 일정치 않았으면 주는 사람 노릇을 하고 살았던 자나, 그러면서도 받아 쓰는 인생에서 벗어나못했던 자나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삶의 규모를 정하며 사는 것과, 남이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남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도 나의 기준을 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내가 선 땅을 좁히는 행위가 아니라, 더 단단히 서기 위한 행위다. 어쩌면 그 테두리를 뛰어넘는 발돋움을 한 행위다.


그러나 엄마는 뛰어넘기는커녕 시선조차 바깥을 향하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자신의 알뜰함을 유일한 능력치라고 자부하던 그녀는 결국 어느샌가 병이 들고 말았다. 우리가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위는 다름 아닌 그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정신적 이상 징후였다. 우리는 그녀의 병명을 아주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병명은 바로 '저장강박증'이었다. 나는 그녀가 강박증으로 쌓아 올린 쓰레기더미를 결국 무너뜨리지 못했다. 겨우 탈출해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아직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한, 탈출이라는 생각도 하질 않고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가여운 나의 엄마를 떠올리며 쓰는 애달픈 기록이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가 겪은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단다."


* 사진 출처: Pixabay, Uschi Dugu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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