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Nov 10. 2024

한숨에도 전염성이 있다면


친구들 사이에서 할아버지로 통하던 아빠는 그 나이에 비해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아내에게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어린 자녀에게도 그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돈이 없더라도 그것을 타개할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다면 똑같은 현실에서도 우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정직한 대화가 오고 갔다면 가정에서의 시간이 블랙홀 같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지 못했다. 가장이니까 모든 것을 책임지라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만이라도 책임을 지길 바랐다. 엄마와 아빠 사이의 대화에는 늘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고, 그 대화는 항상 엄마의 한숨으로 끝이 났다. 어느 한쪽의 묵음으로 인해 대화는 싱겁게 종료되었지만 엄마의 한숨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애처롭고도 어리석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답답하고 무기력했다. 짤그랑 동전을 넣지 않으면 스틱질이 먹힐 리 없는, 제멋대로인 오락기 속 화면을 들여다보며 버튼을 두드리고 스틱질을 해대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슬그머니 넣어줄 동전은 내게도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게임 화면 속으로 블랙홀처럼 빠져들고 있었다. 어떤 소리도, 외침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그러잖아도 연약한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는, 이 땅이 한숨에 꺼져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엄마가 한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슴 이는 기분을 자주 느낀 탓에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은 그 기분이 짜릿함이라는데 한두 번 타본 나로서는 마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과 비슷했다. 그래서 결코 즐겁지가 않았다.


하품에 전염성이 있는 것처럼 한숨도 그런 것일까. 나도 한동안 한숨을 내쉬며 살았고 결혼 후에야 비로소 고쳐낼 수 있었다. 안정감을 주는 남편 덕분에 한숨 쉴 일이 많이 없어지기도 했고, 남편의 피드백을 통해 그것에 대한 전염성을 깨닫고 나서는 아차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한숨 쉬는 엄마에게 '한숨 좀 그만 쉬라'고 말할 수 없었던 건, 엄마가 정말 살기 위한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그렇게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이.


한숨을 먹고 뱉으며 살던 나는 더욱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짙은 한숨 속에 드리워진 기운은 분명 어두웠지만, 그보다도 더 어둡고 캄캄한 안갯속을 터벅터벅 걷기 위해서는 한숨이 필요했다. 한숨으로 안개 한 자락이라도 물리칠 수 있길 바라며. 그렇게 우리는 자주 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살았다. 이후 이하이의 한숨이라는 노래를 듣고 많이 울었다. 나의 엄마가 생각났고, 나의 이야기 같기도 해서. 또 다른 이유들로 사라져 간 사람과, 스러져갈 사람들이 생각나서.


엄마의 한숨은 얼어붙은 손을 호호 녹이는 숨이 아니었다. 오히려 곁에 있던 나를 식어버리게 하거나 얼어붙게 만드시린 힘이 있었다. 그러나 한숨이라는 노래는 난로와도 같았다. 그 무게와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말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쉬어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였다. 한숨에도 전염성이 있다면 위로에도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한숨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위로는 없을까. 우리는 서로를 더 위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외면하는 것처럼 가슴 시린 일이 또 있을까.


* 영상 출처: 이하이 공식 유튜브 채널 - <한숨>


* 사진 출처: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