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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Nov 11. 2024

내가 생각하는 가장이란


경비 일을 구하기 전까지 일용직을 전전하던 아빠도 한 때는 변변한 직장이 있었다고 했다. 언니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 OO 주산 학원.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 앞의 속셈학원이 그전에는 주산학원이었고, 아빠는 무려 그곳의 원장이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상고를 졸업한 고모가 차린 학원이었는데 아빠에게 동업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래도 원장이라니 아빠도 뭔가 해보려는 의지가 있었구나 잠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 뻔했다.


그러나 학원을 차릴 돈마저도 엄마가 외삼촌을 통해 구해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마저도 그의 오랜 의지가 아닌 고모의 순간적인 제안과 엄마의 희생으로 얻어낸 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언니를 낳고 키우던 엄마는 백수였던 아빠가 안정적인 직장을 갖길 원했을 것이고, 일종의 투자금으로 생각해서 외삼촌에게 어렵사리 부탁한 것이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장남의 역할을 하던 큰외삼촌은 백만 원을 송금해 주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80년대 중반, 당시 백만 원이라는 돈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것은 많은 남자 형제들 사이 홍일점이었던 엄마가, 중학생 시절부터 식모 노릇을 했던 고생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빠는 돈을 택시에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그 말을 믿어?"


믿어야지 별 수 있냐, 하던 엄마는 그 시절 얼마나 허탈했을까 싶었다. 사십 년이 흐른 뒤에 들어도 속이 터지는데, 당시 엄마는 속이 문드러졌으리라. 진짜로 잃어버렸다고 해도 남의 돈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했을 것이다. 엄마의 돈을 잃어버린 아빠는 그 뒤로 책임을 지기 위해 얼마큼이나 노력했을까. 아빠는 알았을까. 어쩌면 외삼촌이 엄마의 희생을 알아준 대가로 동생에게 기꺼이 내어준, 그러나 엄마는 구경하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그 돈을. 그 돈의 의미를. 그 돈마저도 남편의 앞길에 밑천으로 삼아주고 싶었던 그 심정을. 희생에 희생을 거듭해 마련한 마음을.


결국 주산학원은 한 달 만에 문을 닫았다고 했다. ○○ 주산학원. 언니의 이름이 박힌 학원 가방이 무더기로 쓰레기차에 실려가는 것을 보며 엄마는 많이 속상했다고 한다. 길었던 그녀의 희생은 너무나 짧은 시간에 무너졌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게 거짓말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알아챘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그가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아니라는 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었기에 어떻게든 믿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내가 가장의 중요성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남편이 경제적인 면에서 유능하지 않더라도 부부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아내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다. 다만 가정에서 안정감을 주는 역할은 가장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 집안을 받치는 기둥으로서의 가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정감이란 보통 성실성과 책임감, 정직함에서 오는데 나의 아빠에겐 어느 것도 온전하게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가장이었으므로 그가 엄마에게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천장이 낮은 집에 들어가면 집에 맞춰 살며 허리를 굽힌 채 생활하듯이 그렇게. 혹은 언제 무너질지 불안해하면서. 때로는 기둥이 없는 천막 속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사는 내내 불안정했다.


어렸던 나는 낮은 천장에도 키가 닿지 않았지만 점점 자랄수록 다른 하늘을 꿈꾸게 되었다. 가까운 친구의 아빠부터 교회의 선생님, 집사님, 학교의 교수님들을 보며 내가 원하는 가장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잔소리가 많은 남편이지만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 잔소리마저도 그는 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실성과 책임감, 정직함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낀다. 훌쩍 커버린 내가 충분히 설 수 있을 만큼 그는 높은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다. 그러므로 맞벌이의 시대에도 가장의 무게는 분명 있다. 그러나 가장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만이 가장이라 할 수 있다.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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