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애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부 Apr 03. 2022

싸인 받은 책을 버린다

지금의 나는 흔적이 묻은 것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이사를 갈 때 책을 한 차례 정리했다. 20대때 돈을 벌기 시작하며 책을 왕창 사던 시절, 나는 학창 시절의 교과서처럼 책 내지의 세로 등에 네임펜으로 이름을 써놨다. 이름을 적으면서 소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책이거나 이상이거나 지적 허영심이거나 아무튼 그때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 닮고 싶었던 것들을. 가끔은 한줄씩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 읽으면 너무 창피하지만 그때는 떳떳해서 누군가 읽어봐주었으면 하던 내 마음들. (지금 부끄러운 이유는 그 마음들이 발현되지 못한 채로 나이를 먹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사를 하며 책을 버리는 중에 꽤 고생을 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것도 그 부분만 찢거나 없애거나 덮을 수 없는 곳에 이름을 써놨으니까. 책들 중에는 작가들의 싸인본도 여럿 있었다. 싸인은 면지만 찢어서 버리면 되니까 오히려 수월했던 것 같다.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이름은 곧 흔적이고, 흔적이 묻은 것은 영원히 내가 안고 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흔적이 묻은 것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그건 아니다. 다만, 내가 묻힌 흔적들이 상대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한다. 어쩌면 나 혼자 의미부여 속에서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연해진다. '그 시절'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애타하고 "우리 그때는 그래도 무언가 특별했잖아"라는 생각에 이따금씩 생각해보는 일. 그런 일들이 줄어들어야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할 때 욕하기 vs 울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